“‘선빙찬’하고 부르셨던 어머니 음성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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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어린 시절의 추억

▲내 고향 거로(巨老)마을
‘향교에 들려면 거로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조선시대 유배지의 영향으로 학문이 융성했다는 말이다.
과거에는 거로와 황사평 등 2개의 자연 마을이 법정동(화북2동)으로 형성돼 거로마을은 선비들이 많았던 문촌(文村)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거로마을은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에 거로(居老)로, 1700년대 말에 그려졌다는 고지도에는 거로촌(巨老忖)으로 표기됐다.
거로와 부록마을의 형성은 약 900년 전 부록지점의 맑은 샘터(속칭 절샘)를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해 사찰이 생긴 후 마을이 점차 확대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는 상처를 당해 나중에 재건되며 현재에 이른다.

▲막내로 자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는 1941년 1월 4일(양력) 2남 3녀의 막내로 나를 낳으셨다.
위로 한 분 형님(규찬)과 세 분 누님(옥순, 옥립, 옥녀)이 계셨다.
아버지의 이름은 현상언(玄商彦), 어머니의 이름은 양희아(梁希兒)이다. 아버지 나이 43세, 어머니 나이 41세에 태어났으니 늦둥이였던 셈이었다.

▲ 부모님 모습.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식들을 키우는 보람 하나로 살다 가신 지극히 평범한 제주의 농민이셨다.
일제강점기에 농사를 짓다 살림이 어려워지자 일본으로 잠시 다녀온 적이 있지만 아버지는 해방 전에 일본에서 돌아왔다.
당시 모두가 가난했던 농촌생활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몰라도 귤나무의 일종인 병귤과 복숭아나무를 재배해 당시 어려운 농촌에서도 밥을 먹고 살 정도는 됐다고 한다.
또 아버지는 신교육은 비록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한문을 깨쳐 서당을 만들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어찌나 완고하셨는지 돈을 줍거나 물건을 다른 데서 가져오면 다시 그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채근하셨던 일도 있다.
어머니도 교육을 받지 못해 글자는 몰랐지만 보리짚으로 일일이 계산을 해 셈이 상당히 빨랐다.

▲4·3의 記憶
해방 이후 4·3으로 우리 마을은 엄청난 해를 입었다.
훗날 정리한 기록을 보면 60호 정도였던 현재의 화북 1동 서쪽 ‘곤을’마을은 완전히 폐동이 된 채 재건하지 못했고, 거로와 황새왓도 완전히 불탔던 것을 나중에 재건했다. 또 4·3의 소용돌이 속에 죽은 사람만도 좌우 양쪽에 황새왓과 거로, 화북 1동을 포함해 200여 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됐다고 한다.
화북교에 입학은 했지만 집이 불에 타 피난을 왔던 터라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온 가족이 거로마을 위쪽 밤나무밭에 있는 사형대에 섰던 기억은 생생하다.
당시 형님이 동남교에 재직 중이었는데 경찰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무장대에 몰살당할 뻔했던 것이다.
1948년 겨울이 막 가기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마을 구장이 “우리 마을에 유일한 선생 가족의 씨를 말리겠느냐”는 항의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가족들은 살아났다. 그러나 구장은 나중에 토벌대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할 뿐이다.

▲제주 북초등학교로의 전학
1949년 해가 바뀌자 나는 제주북교 2학년으로 전학을 했다. 당시 전학은 형님이 제주북교로 학교를 옮기면서 계기가 됐다.
교원양성소를 졸업해 일찍 교직에 입문했던 형님은 나와는 띠동갑인 12살 차이로 북교를 다닐 때 고창부 대한접골원장과 동창으로 반에서 1, 2등을 다투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애석하게도 형님은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50세의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슬하에 4남1녀가 있다.

▲ 제주북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 반 친구들과 함께 별도봉에 소풍을 가서 기념촬영을 했다. 앉은 순서로 뒷줄에서 5번째가 현병찬 선생.

“선빙찬! 학교강 선싱이 선빙찬 허거들랑 예! 해영 크게 대답허라이”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어머니가 당부하신 말씀이다. ‘현병찬’이라고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선빙찬’이라고 불렀던 어머니는 지금은 가셨지만 그 음성이 그립다.
전학은 갔지만 부지런히 공부도 하고 열심히 그림도 그렸는데 밤에 각지불로 공부를 하고 나면 콧구멍이 검댕이 되었다. 책이 없어 마분지나 선화지로 만들어 공부를 했다.
이렇게 어렵게 공부를 하다보니 3학년이 되던 해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화북2동 거로마을에서 제주북교까지 거리가 6㎞였다.
비가 와도 우비나 우산도 없이 비닐로 만든 비료포대 한 장으로 다녔다. 4학년 되던 해 겨울 어느날, 허리에 책포대기를 둘러메고 학교를 갔다. 하늬바람 쌩쌩 불고 눈발이 얼굴을 때렸지만 고으니모르 동산을 넘을 때 난데없이 미끄러져 쓰러졌다.
똥마차에서 쏟아진 똥물에 미끄러진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집에 돌아와 씻고 학교를 못 간 것이 억울해서 울고 또 울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우등상과 개근상은 꼭 타려고 노력했는데 그해 개근상은 그 똥마차 때문에 날라갔다.
한번은 별도천 배닛내에서 목욕을 하다 수영을 못해 빠져 6학년 선배가 구해주었던 기억도 있고 아침에는 마라톤, 저녁에는 축구로 보내는 날이 많았다.
지금도 화북에는 “화북 아이들은 어멍 뱃속에서 뽈 차멍 나온다”라는 속담이 회자된다.
그만큼 일제강점기부터 화북리에 축구를 하는 인구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러한 축구의 전통은 젊은이들을 단합하게 만들었고,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축구에 빠지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제주제일중학교 입학
어머니가 부르는 ‘선빙찬’이 제주북교를 졸업했다. 1954년 겨울이었다.
동창들이 44회다. 지금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는 서예와 관련해서는 초등학교 시절 딱히 기억에 남는 일이 없다. 여러 가지 여건도 부족했고, 6학년에 올라가서 일본식 ‘습자형’으로 붓글씨를 썼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맨드라미 그림을 그리자, 당시 선생님이 교무실로 데리고 가서 자랑을 했다.
“현병찬이 그린 그림이다”라고. 이상하게도 이후로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너무 극찬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도 제자를 가르칠 때면 칭찬을 조금 하지만 극찬은 하지 않는다. 그때 경험 때문인지 모르겠다.

▲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축구는 동료들과 자연스럽게 단합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쯤 제주제일중학교 운동장에서 체육시간에 반 대항 축구를 하는 모습이다.<만농 홍정표(晩農 洪貞杓) 선생 사진집서 발췌>

솔직히 우등상을 계속 받았는데 1등은 하지 못했다. 기억하기로는 소설가 현기영, 국회의원을 지낸 현경대, 검사를 지낸 오윤덕 동창 등이 반에서 1등을 다퉜다.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진로를 고민하게 됐다.
당시 중학교는 명목상 A반, B반, C반 등으로 편성했지만 알고보면 출신지별로 나눴다. 제주시내권은 이도동반, 삼도동반 등으로 나눴고 화북·도련·삼양·봉개 등을 묶어 또 한 반을 편성했던 식이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유로 일찌감치 제주사범을 준비하게 됐다.
정치를 하거나 장사를 하면 불안하고, 교직에 있으면 존경을 받는다는 논리였지만 형님의 교직생활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님은 학비를 책임지겠으니 일반 인문고에 진학하라는 권유도 했다.
제주제일중을 6회로 졸업하고, 제주사범에 진학했는데 당시 경쟁률은 3 대 1이었다.
정리=김홍철 기자 hckim@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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