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길은 죄인의 행로 아닌 문화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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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서 당대 최고 문인·문객과 작품 교류
동지부사로 북경 방문해 인적 네트워크 형성
역관 이상적 등 지인들의 도움…추사체 완성
▲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추사고택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안채 뒤쪽의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가볍게 산책을 즐기거나 쉬기에 좋으며 또 주변에 추사 선생의 묘와 추사 선생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과 부인인 화순옹주의 합장묘인 월성위묘가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추사 고택은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경험과 실크로드
제주도가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로 꼽혔다. 반가운 일이다. 세계 관광업계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중국인들을 잡기 위한 배전의 노력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호기심을 끌 수 있는 중국과 관련된 스토리들이 많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서복(徐福)전시관도 있지만 스토리텔링이 빈약하다. 이런 차원에서 추사 김정희는 매우 중요하다.

 

제주도와 중국을 이야기 할 때 추사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추사는 중국과 제주도를 문화적으로 이어준 메신저였다. 그러기에 추사유배길은 문화의 실크로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사유배길을 통해 선진 서적들은 물론 글씨와 그림 등 당대 최고 작품들이 오갔으며 최고의 문인·문객들이 내왕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과 중국 사이를 오가면서 문화를 전파한 사람들은 사신들이었다. 조선 지식인들이 인식의 폭을 넓혀 가는 경로는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의 이야기와 중국에서 수입된 서적을 통한 것이었다.

 

추사는 사신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방문하여 직접 인맥을 만들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적인 교류를 통해 학문의 폭을 넓혀나갔다. 이 과정에서 역관 이상적이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이상적의 빈번한 연행과 주선을 통해 얻은 중국 학예계의 정보와 자료를 활용하여 추사는 국제적인 차원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주도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물론 국내 학예계의 정보와 자료들이 추사에게 그대로 전달됨으로써 연구 활동이 계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상적은 물론이며 친구와 친지 그리고 다른 여러 제자들이 추사를 헌신적으로 도왔던 것이다. 그 덕에 추사체도 완성될 수 있었고 이제 추사유배길은 단순한 죄인의 행로라기보다는 문화의 실크로드로 거듭 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을 다녀와서
추사는 북경 기행을 기점으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순조16년(1816) 북한산에서 당초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있었던 ‘진흥왕순수비’를 새로 발견한 것이 첫 업적이다. 이어 황초령순수비도 고증하고 이런 결과를 집대성해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을 편찬한다. 그는 금석문뿐만 아니라 천문, 경전 등에 대한 연구도 게으르지 않았다.

 

▲ 활자본. 10권 5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68년(고종 5)에 문인 남병길(南秉吉) 등이 편집 간행한 ‘완당집(阮堂集)’, ‘완당척독(阮堂尺牘)’ 및 ‘담연재시집’등을 1934년 현손인 익환(翊煥)이 합편, 서울 영생당(永生堂)에서 간행하였다. 권1은 고(攷) ·설(說) ·변(辨), 권2∼5는 소(疏)·서(書)·독(牘), 권6은 서(序)·기(記)·발(跋), 권7은 전(箋)·명(銘)·송(頌)·잠(箴)·상량문(上樑文)·제문(祭文)·묘표(墓表)·잡저(雜著), 권8은 잡지(雜識), 권9∼10은 시(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책머리에 남병길의 서문과 민규호(閔奎鎬)의 소전(小傳)이 있고, 권수(卷首)에는 서(序)·구서(舊序)·소전·초상(肖像) 등이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학문적 논저를 많이 남기지는 못했다.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을 볼 때 추사의 학문적 수준을 느끼기에 충분하지만 대학자의 면모로는 어딘지 빈약하다. 이런 까닭에 추사는 학자이기보다 예술가로 기억되는 것이 사실이다.

 

추사는 계속적인 교류를 통해 중국에서 보내주는 글씨체를 연구하여 후일 추사체를 이루기 위한 기반을 닦는다. 이는 추사체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자료와 정보들을 집대성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전적으로 청나라의 레퍼런스에만 의존했을까?

 

분명한 것은 추사의 학문이 집안의 전통과 함께 정조 임금 시대에 축적된 지성을 바탕으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청나라의 학자들과 빈번한 교류를 통해서 얻어진 측면만을 편중해서 보아서는 안 된다.

 

북경에서 돌아온 추사는 10년 동안 공부에 매진을 한다. 그 덕분에 그의 학문적 틀이 완성되고 순조19년(1819) 34세에 대과(大科)에도 합격한다. 이후 규장각대교,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검상(정5품), 예조참의(정3품) 등을 거쳐 시강원 보덕에 이르는 출세의 길을 달린다.

 

한편, 그의 아버지도 북경에서 귀국한 후 공조판서에서 평안감사에 이르기까지 요직만을 두루 거친다. 이로써 20여년 가까이 부자가 나란히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세상의 질시뿐이었다. 당대 권력을 틀어쥐기 시작한 안동김씨가 이를 좌시할 까닭이 없었다.

 

바야흐로 순조30년(1830) 효명세자의 죽음을 빌미로 안동김씨 측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대대적인 탄핵정국이 전개된다. 순조는 추사 가문을 적극 비호했지만 결국 추사의 아버지는 고금도에 유배를 가게 된다.

 

다행히 아버지가 해배되면서 추사 부자는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아버지는 판의금부사로, 추사는 성균관 대사성에서 병조참판으로 승진된다. 그러다가 헌종4년(1838) 아버지가 73세로 별세하자 추사는 복상(服喪)을 위해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난다.

 

아버지 김노경은 천수를 누리는 동안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낼 만큼 최고 권력의 단맛만을 보고 세상을 떠나게 된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권력의 쓴 맛뿐이다. 결국 그것은 남은 아들의 몫이 된다.

 

복상이 끝나자 헌종5년(1839) 추사는 다시 형조참판에 오르고 다음해 6월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권력의 핵심에 발탁된다. 동부지사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을 때가 25세 때였으니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같은 직책을 맡아 중국에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벅차했겠는가. <양진건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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