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다툼의 미로속에서 탄생한 ‘추사 유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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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측 파놓은 함정에 빠져 위험 직면
친구 도움으로 죽음 직전 풀려나 제주 유배
조선 후기‘世道정치’가 ‘勢道정치’로 변질
▲ '추사의 길'은 추사 김정희의 흔적과 자취가 남아있는 서귀포시 대정과 안덕을 중심으로 유배 노정을 따라가며 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스토리텔링 중심의 도보체험코스다.

▲헛된 이름 사방에 났지만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 상(喪)을 끝낸 추사는 헌종6년(1840) 6월 동지부사에 임명된다. 30년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 갔지만 이제 추사 본인이 사신이 되어 북경을 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크게 마음 설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 권력을 틀어쥐기 시작한 안동김씨 측이 권력의 핵심으로 재부상하는 경주김씨 세력인 추사를 가만 두고 볼 이유가 없었다.

 

10년 동안 조용하던 안동김씨 측은 윤상도 옥사(尹尙度 獄事)”를 내세워 탄핵에 또다시 불을 지핀다. 순조 임금 때 효명세자의 죽음을 빌미로 전개되었던 탄핵정국이 재현된 것이다. 권력의 집요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번에는 헌종 임금이 추사를 적극 옹호했지만, 안동김씨의 세력은 이미 왕의 권위까지 넘볼 정도였다.

 

결국 추사는 안동김씨 측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북경행 대신에 돌아온 것은 혹독한 고문뿐이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죽음 직전에 겨우 풀려나 헌종6년(1840) 9월4일 제주도로 유배되니 그의 나이 55세였다. 헛된 이름 사방에 났지만 모든 것이 텅 비어 이제 추사에게 남은 것은 망신창이 몸뿐이었다.

 

이렇게 추사에게 불어 닥친 가화의 원인은 다름 아닌 11세에 국왕이 된 순조와 8세에 국왕이 된 헌종시대에 맹위를 떨쳤던 세도정치 때문이다. 세도정치의 특징은 최고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할 국왕이 사실상 능력이 부족하여 국왕의 주변인물들이 대신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순조가 아직 어려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에는 경주김씨가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직접 정사를 돌봄으로써 이후 권력은 장인인 김조순이 잡게 되었고, 정국은 안동김씨가 주도한다. 순조의 병이 심해진 것을 기회로 대리청정하게 된 효명세자는 자신의 세력을 육성하여 안동김씨에 대항하고자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 등을 발탁한다.

 

그러나 갑작스레 세자가 죽자 다시 친정하게 된 순조를 앞세운 안동김씨는 세자 대리청정기에 형성된 세력들을 축출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더 강력하게 재구축한다. 이때 안동김씨는 세자의 핵심세력들을 정적으로 상정, 이들을 숙청하기 위해 탄핵정국을 이끌었는데 김노경이 가장 심하게 당한다. 이 일이 있고나서 10년 후 헌종6년(1840),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헌종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게 되는 시점에서 안동김씨는 “윤상도 옥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자기네 사람들의 소행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안동김씨 측은 끝까지 추사를 배후로 얽어 결국 그를 제주도로 유배를 보낸다. 이로써 추사의 일가는 또 한 번의 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윤상도 부자의 상소문을 추사가 초안했다는 안동김씨 측의 허위진술 때문에 추사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게 된다.

 

다행히 우의정이던 벗 조인영의 도움으로 추사는 목숨만은 건진 채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 권돈인은 형조판서로 있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사건은 얼핏 복잡하게 보이지만 본질은 매우 단순하다.

 

권력구조의 변동을 원치 않았던 안동김씨 세력들이 처음부터 추사를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것이고 추사는 무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 결과 헌종은 “국청에서 수금한 죄인 김정희를 대정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라.”(鞫囚罪人正喜大靜縣圍籬安置)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 추사 김정희는 편지광이었던 만큼 유배지인 제주에서도 가족과 지인들에게 편지를 자주 썼다. 그의 시문집인 완당전집에도 지인에게 보냈던 서간문들이 실려있다.

▲서로 찌르고 난자하기를 밥 먹듯이
추사의 제주도 유배 원인인 세도정치는 원래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한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임금과 일가인 척신(戚臣)이나 임금의 총애를 받는 총신(寵臣)이 강력한 권세를 잡고 전권을 휘두르는 부정적 정치형태를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인다. 이렇게 世道정치가 勢道정치로 타락, 변질되어 권세정치의 형태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순조 때였다.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김조순이 장인이 되어 순조를 보필하면서 안동김씨가 전권을 틀어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추사의 집안이 온전할 리 없었다. 그 뒤 헌종 때는 풍양조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계속되다가 철종 때에 다시 안동김씨로 이어진다. 이로부터 세도정치는 타락의 절정을 이루다가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이 안동김씨의 세력을 몰아내고 외척의 대두를 경계하지만 결국 명성황후에 의해 실각한 뒤로는 한말까지 민씨 일족에 의한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조선후기는 세도정치의 나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에는 이런 일들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만도 않다. 특히 요즘 들어 각종 선거 뒤에 진행되는 권력의 부침들을 보면서 현대판 세도(勢道)정치를 실감한다면 지나친 말인지 모르겠다.

 

청와대 인사와 관련, 소위 ‘MB 순장조’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순장조라니?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를 총신(寵臣)이라고 하던 조선시대만도 못한 반문명적이고 비문명적인 표현이요 인식이다. 순장이란 통치자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 함께 묻는 고대 장례 습속이지 않은가. 이 나라가 어디 고대국가인가? 이 나라가 어디 주군을 위해 죽음을 준비하는 조폭국가인가? 이런 인식은 우리나라 특유의 가부장적 군사문화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사회의 개명천지 아래서 중앙이나 지방정가를 막론하고 이런 인식이 만연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지경에서 순장조들에 의한 권력행사라는 것이 과연 어떨지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추사도 그런 순장조들의 칼부림에 당한 것이었다.

 

화려한 글쟁이로 소문 나있는 중앙일보의 정진홍은 “권력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면 결국 몸은 난자당하기 일쑤다. 정치에서 금도(襟度)는 사라진 지 오래다. 서로 찌르고 난자하기를 밥 먹듯 한다. 그거 못 하면 바보 취급당하고 그거 잘 하면 힘이 있다고 말하는 현실이다. 권력이 뭐고, 자리가 뭐기에 이 난리들인지 모르겠다.”라고 어느 칼럼에서 쓴 적이 있다. 작금의 정치판을 지적한 것이지만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양진건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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