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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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머뭇거리고 뜸을 들이다보면 시간은 혼자 달려가 현실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 주위에 사람들이 갑자기 볼 수 없게 되고 그런 상황은 내가 납득하고 받아들이기도 전에 이미 현실로 자리를 잡는다. 이처럼 빠른 흐름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려고 할 때 종종 어느 선생님 댁에 걸려있는 액자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오른다. “청무성 시무형 (聽無聲 視無形)”인데 그 미묘한 의미가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를 보도록 하라는 뜻 같은데 다시 한번 자세히 여쭤보고자 해도 선생님께서는 계시지 않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시절은 이미 과거 이야기이며, 현실에서는 다른 물결이 일어나서 나를 밀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믿고 따르면서 그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이 대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예를 들면 이제 그만 좀 못살게 굴라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형태로 우리 몸은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몸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고 계속 몸에 해로운 일만 골라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주변에 사람들이 무엇으로 병들고 마음 속에 어떤 비명이 흐르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일도 없고 또 그것을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여기기도 한다. 대화 도중에 받는 상처, 겉으로 벗겨져 피 흐르지 않는다 해도 골수에 맺히는 그 아픔을 우리는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내 몸의 파괴와 나를 둘러싼 관계의 상실이 라는 아픈 대가를 치른다.

또한 우리는 TV에 광고에 세뇌가 되어서 의식 속에 환상을 창조하여 있지도 않은 누각을 믿고 살기도 한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은 믿고 믿어야 할 것은 믿지 않은 채 허와 실을 착각하고 산다고 할까. 선전에서 말하는 대로 믿고 거기에 전 재산을 걸었다가 당하여 비참하게 쓰러진 일도 있었는데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유사한 일이 다시 발생한다.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신기술로 인해 기업은 날로 번창하는 듯이 보이고 해외에서도 인기 상승으로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업체들이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 개발해 놓은 원천기술과 특허를 기본으로 한다는 사실이나, 그 때문에 외국 기업체에게 엄청난 로열티를 물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남의 기술로 장사하며 자주 자립을 확립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줄기에서 잘라낸 꽃봉오리를 사다가 물에 꽂아서 잠시동안 꽃은 활짝 벌어지지만 그 열매나 씨앗은 남길 수 없는 상황과도 같은데 우리는 기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다양한 학원에 요리조리 시간을 짜 맞춰 아이들 보내면서 교육을 잘 시키고 자녀관리를 잘한다고 믿는 부모들, 그들은 아이들이 학원에 가고 성적이 약간 오르는 것만 보일 뿐,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실천할 권리를 빼앗기면서 아이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그 내면에서 어떤 성향과 기쁨이 지쳐서 죽어가고 병들어 파리해 지는지는 보고 들을 줄 모르는 것이 아닐까.

말 못하는 짐승의 소리 없는 애원을 알지 못하고, 고통받는 나무들의 신음도 아랑곳 않고 우리는 살고 있다고 할까, 아니 죽어간다고 할까. 나무들의 푸른 합창도 새들이 날아가는 하늘의 경이로움도 우리에게는 감각 밖의 일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제대로 볼 능력이 없는데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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