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제대로 구명할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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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 과정 중에 생겨났던 문화로,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자취 중 뒷날에 계승?상속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을 문화유적이라 한다. 이 문화유적에 관한 관심은 그것을 가진 집단이나 민족에게 소중할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유적은 제대로 구명해야 한다. 제대로 구명하지 않으면 뒷날에 많은 수고를 하게 된다. 더욱이 학문적으로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게 되는데, 그로 인한 파장은 엄청나다.

공식적으로 제주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것 중 연대 몇 개를 보자. 서귀포시 월평동 마을 안에 연딋?르(또는 연듯?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 연대 터가 있었는데 도로를 확장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서북쪽 일대를 머으내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제주의 방어유적?(제주도, 1996:244-245)에는 ?希川烟臺(마희천연대: 머흐내연대)가 강정동 4695번지의 새벨동산에 있었던 것으로 표시하였고, ?서귀포시지명유래집?(서귀포시, 1999:360)과 ?서귀포시문화유적분포지도?(서귀포시, 2000:100)에는 강정동 5452번지의 망팟에 있었던 것으로 표시하였다. 그렇다면 ?希川烟臺[머흐내연대] 터는 세 곳이 되는 셈이다.

조선시대에 봉수나 연대를 옮기거나 없애고 증설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책에 서로 다르게 표시된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경우는 또 있다. 색달동 해안가에 別老川烟臺(별로천연대: 베로내연대)가 있었다. 위 앞 책에는 색달동 1795번지 연딋동산에 있었던 것으로 표시하였고, 위 뒷 책에는 중문골프클럽 안의 육모정이라는 건물지에 있었다고 표시했다.

한편 남제주군 안덕면 月羅峰(월라봉) 앞쪽에 이두어시라는 곳이 있다. 16세기 말의 ?탐라도?(가칭)에는 ?山望(호산망)으로, ?한라장촉?에는 伊頭於時望(이두어시망)으로 표기했다. ?세종실록?에는 仇山烽火(구산봉화)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堀山烽燧(굴산봉수)로 표기하였다. 그런데 이원진의 ?탐라지?(대정현, 봉수)를 보면, ?山烽燧(호산봉수: 굴메봉수)가 예전에 굴메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 해안으로 옮겼다고 했다. 1709년의 ?탐라지도?에는 伊頭烽(이두봉), ?제주삼읍도총지도?에는 二頭烽(이두봉)으로 표기했는데, 지금의 군산 정상이 아니라 월라봉 아래쪽에 표시하였다. 그렇다면 원래 봉수는 지금의 군산 아래에 있었다가, 나중에는 이두어시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의 방어유적?(1996:175)은 어느 정도 비슷한 위치에 표시했으나, ?남제주군문화유적분포지도?(2003:43)에는 지금의 軍山(군산) 정상에 호산봉수가 있었던 것으로 잘못 표시하였다. 더욱이 지금도 이두어시에 굴메봉수터가 남아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문화유적을 제대로 구명하는 것은 오늘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다. 사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일부터 실천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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