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는 어른·스승 공경, 이웃사랑 정도 걸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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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대상…최정균 선생 “세가지 놀라운 수상”
농산물 장사까지 했던 아내 내조덕에 서예 지속
가훈 쓰기, 많은 이에게 기쁨 주고 길잡이 돼 보람
▲ 1992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상작 전시에서 대상 수상작 ‘한라산 시’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필자.

■ 먹(墨)이 좋아서
서예술은 사람됨을 전해 주는 예술이다. 양심을 건드리고 진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 서예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동강 조수호 선생의 ‘서예술소요’를 잠시 들여다보면 “인간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는 예술에서 결정된다. 인간의 글씨, 인간적인 서예술, 맛 들여 보면 너무나 오묘하고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다”고 했듯이 먹 내음과 붓길 따라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반세기는 나에게 묵향의 꿈을 키워온 보람된 시간이었다.

 

어렸을 때 꿈은 적어도 수학자가 되어 보겠다는 포부 속에 학문의 길을 걸어 보려고 마음 먹었던 것이 중간 중간 먹이라는 짙은 색깔에 휘말려 예술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 같다.

 

학자든 예술가든 고행 길은 만만치 않겠지만 서예의 길에 서게 된 것은 한 단계 한 단계 보람을 쌓는 성취감이 있었기에 그 꿈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교사로 재직할 때까지만 해도 수학자의 꿈이 남아 있어서 틈만 있으면 곁눈질을 해 오곤 했었는데, 수학자의 길을 접은 것은 친구의 만류와 새로운 꿈에 대한 열망에서 온 결과가 아니었나 하고 회상해 본다.

 

그 결과 1989년 국전의 맥을 이어온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첫 입선을 시작으로 1990년, 1991년까지 3회 입선에 이어 1992년 11월에는 영예의 대한민국 서예대상을 받게 됐다.

 

나 자신은 물론 전국의 언론사와 주변 여러 사람들도 믿기지 않는 영광이 돌아온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한국서예의 원로 대가이신 남정 최정균 선생은 세 가지 놀라운 수상이라며 “그 하나는 한글서예작품이 대상을 받게 된 것, 둘째는 한국의 지역적 변방인 제주도에서 대상을 가져 갔다는 것, 셋째는 현직 교감에게 영광을 안겨 줬다는 것”이라고 과찬을 해주셨다.


■ 내조의 힘을 믿고
지금부터 50년 전 1961년 4월 19일 제주동초등학교 서쪽 울타리를 끼고 귤림예식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에 어린 나이로 신랑 자리에 서서 내조자를 맞이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하객들 중에는 귀엣말로 수근대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 아이가 결혼한다고,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느냐고 하면서….

 

그렇지만 처녀 김춘하와 총각 현병찬이 김시현 주례선생 앞에서 당당하게 만나 부부로 맺어지는 예식이라고 설명하는 형님만이 고역(?)을 치렀을 뿐 제주북교 44회 졸업생 동기동창 부부가 탄생하는 엄숙한 자리였다.

 

나는 체구가 좀 마른 편이고 내향적인 성격이라서 배우자는 조금 풍성하고 명랑한 여자를 생각했는데 거의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성격도 정반대였다.

 

나중에 출신학교 옛 생활기록부를 뒤져보니 6학년 2반 담임을 맡았던 고영남 선생님은 나를 “온순 침착하고 여성적이며…”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6학년 6반 담임이신 김종덕 선생님은 아내의 기록을 “명랑, 쾌할하고 남성적이며…”로 평가해 당시 각기 다른 반에서 평가를 했는데도 이렇게 간단 명료하게 잘 표현됐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1960년 10월 30일 세화교에 초임발령을 받고 1967년 8월 제주동교에 전근발령을 받을 때까지 7년 동안 구좌읍 세화리에 거주하면서 젊은 부부는 1녀 2남을 두고 알뜰하게 살았다.

 

박봉에 객지생활을 꾸려 나가려니 경제적으로 어려워 농산물 장사까지 해가며 살아야 했던 아내의 생활력 덕분에 나는 나만의 일에 부지런히 매진할 수 있었다.

 

1969년 12월 제주동교에 부임해 2년이 조금 넘어 29살 되던 해에 뒤늦게 군입대 영장이 배달됐다.

 

신체검사를 받고 논산훈련소에 입대, 화학병참 병과를 받고 다시 부산에서 특수 교육을 받아 대구 2군사령부에서 1년을 복무하다 상병으로 제대했다.

 

뒤늦은 병영생활이었지만 짓궂은 한 친구를 빼고는 모두 전직교사이며 서예가라는 나의 경력을 존중해 줘 불편 없는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제자들이 보내주는 위문편지와 서예작품은 같은 내무반 동료들에게 부러움이 되곤 했다.

 

부지런히 살다 보니 지금은 3남 2녀의 자식을 두게 됐고, 아내의 내조 덕분에 내 맘대로 하늘을 나는 듯 묵향에 꿈을 싣고 창작의 길을 유유자적하며 즐기고 있다.

 

성격이 다르고 취미가 전혀 다른 배우자끼리의 생활이었지만 가정적인 내조에 힘입어 나의 일에 매진해 살다 보니 벌써 올해가 결혼 50주년이 되는 금혼식을 맞이하게 됐다.


■ 먹에서 얻는 보람
근간에 가훈쓰기를 많이 하고 있다. 특별히 우리말 가훈쓰기에 더 열중하고 있다.

 

현장에서 쓰는 작품이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행사장에 들렀다는 기념으로 가치가 있는 듯해 쓰고 있는데 받는 분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는 보람을 느끼게 된다.

 

내가 붓글씨를 씀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고, 내가 쓴 글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내겐 보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작품을 통해 소장한 분들과 오랫동안 대화의 매개물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뿌듯하다.

 

오늘 내가 쓴 가훈이 집집마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어서 온 식구가 마음으로 읽으면서 생활의 길잡이가 되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더 정성을 들여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한다.

 

먹은, 그리고 붓은 선비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그러기에 붓을 잡을 때는 내가 선비구나 하는 마음으로 운필하게 되는데 작품 안에 선비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작품을 돈으로 거래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의 작품은 팔지 않는 글, 고맙게 받아 가는 글, 좋아서 소장하고 싶은 글이라고 해석해 주면 가벼운 마음으로 가훈 보급 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예작품은 그 가치를 작품의 수준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작품과 작가의 인품까지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예작품에는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을 소장할 때에는 작품과 더불어 작가의 인품까지를 소장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값이 올라 있는 서예 작품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경천(敬天)이라는 작품인데 4억원을 호가한다.

 

작품성이 뛰어난 점보다는 안 의사의 인품과 우리 사회에 심어 놓은 덕망을 더 높이 평가한 데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다른 미술작품의 평가척도와는 달리 서예작품만이 갖는 특징일 것이다.

 

그러기에 보통 서예가라면 안중근 의사처럼 애국자는 못 되더라도 어른 존경, 스승 공경, 이웃사랑을 비롯한 사회봉사 등을 실천하는 바른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서예인으로서 자부심과 작가로서 삶의 보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정리=김홍철 기자 hckim@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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