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授受)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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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전 제주도문인협회장/시인
누군가 힘들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에게 도움을 주고 용기를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가.

요즘 쓰나미로 재앙을 당한 이웃나라 일본 돕기 온정이 연일 쏟아지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진다. ‘너희는 주라!’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어도 인간의 본디 심성은 취하는 것에 있지 않고 베풀고자 하는 데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들고 어려운 처지의 이웃들을 도울 줄 아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과 용기 있는 실천에 오로지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럴 때 나는 어느 종교 단체가 즐겨 쓰는 ‘수수(授受)의 법칙’이 문득 생각난다. 수수(授受)란 한자 풀이로 한다면 주고받음이다. 그렇지만 이는 단순히 내가 너에게 이만 한 걸 줬으니 너도 나에게 그만한 뭔가를 되돌려 줘야 된다는 거래형식의 의미가 아니다. 베풂에 있어서 시자의식(施者意識), 즉 내가 준다고 하는 의미와 수자의식(受者意識), 즉 누구에게 준다고 하는 의미 그리고 시물의식(施物意識), 즉 무엇을 준다고 하는 의미로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구에겐가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은 역시 내가 누구에겐가 다시 도움을 주기위한 전제라는 의미에서 ‘수수(授受)의 법칙’은 성립된다고 하겠다.

요즘 우리사회에 뜨겁게 일고 있는 ‘나눔의 운동’이라거나 ‘더불어 사는 사회 만들기 운동’ 같은 것들 모두가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한다면 이 운동을 실천하는 이웃과 단체가 있음으로 해서 한층 더 우리 사회가 밝아 보이는 지도 모른다. 굳이 두둑한 자금이 아니어도 좋고 커다란 권력과 권세가 아니어도 좋다. 내 주머니 속의 동전 몇 개 혹은 그마저도 없다면 내가 가진 조그만 지혜 혹은 지식 또는 기능 아니면 따뜻한 마음을 열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우리의 이웃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눔의 의미는 크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 일을 실천하는 이웃과 사회단체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천 능력 중 어려운 재정부담 부분은 일정액을 행정기관의 보조금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이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도 한다.

내가 속한 문학단체도 예외는 아니다. 넉넉지 못한 문학인들이 주머니를 털고 바쁜 일정들을 쪼개가면서 그들이 가진 문학적 재능과 지식을 매마른 사회의 정서 순화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열린창작교실’이라든가 ‘찾아가는 문학강좌’ 혹은 ‘청소년을 위한 문학 프로그램’ ‘장애인을 위한 창작강의’ 등은 그 좋은 예들이다. 이 모두가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의 손이 못 미치는 분야를 자선적 성격의 문학인 활동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활동이 그들의 지식과 지혜, 아까운 시간 그리고 희생적 정신과 노력 에도 불구하고 수반되는 재정적 부담문제는 어찌할 수가 없는데 있다. 그래서 신청한 사회단체 보조금마저 행정기관은 냉정하다.

단체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는 사업도 아니요 오로지 행정기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대신 해서 해결해 주고자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30% 자체부담이라는 사회단체보조금의 일반기준을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는가 하면 이마저도 주네 못주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위 ‘하고 싶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라’는 의미라고나 할까.

그렇다. 이 사업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제주사회는 어떤 형태로 든 돌아갈 것이고 우리들의 문학단체도 그들의 방식 데로 돌아갈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를 항변하던 문협 회장단 중의 어느 한 분은 사의마저 표명할 만큼 그 파장 또한 크고 안타까우니 이 노릇 어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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