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 “추사와 서로 사모하고 경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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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추사 그리워 제주바다 다섯 번 건너
편액글자·수제차 주고 받으며 우정 다져
허련‘해천일립상’으로 스승에 존경 표현
▲ 1843년 제주의 실경을 그린 ‘오백장군암도(五百將軍巖圖·사진)’는 허련이 두 번째 추사를 찾아가서 만든 화첩 ‘소치화품(小癡畵品)’중 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한라산 정상 남서쪽 영실계곡의 기암군을 그린 것이다.

□ 멀리서 찾아온 친구와 제자
초의(草衣) 의순(意恂)
초의스님은 추사와의 관계를 “추사공과 나는 평소 신의가 두터웠으므로 서로 사모하고 경모하며 경애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기에 초의는 추사를 만나러 다섯 차례나 제주바다를 넘어 대정을 찾았을 만큼 우정을 자랑했다.

 

추사는 “한 차례 왕래 하겠다 하면서 실제로는 왕래가 없으니”라고 하면서 초의의 방문을 재촉했다. 그러다가도 편지라도 오면 “서신 한 장만 얻어 보아도 다행스러운 일인데 어찌 그 층층 바다를 넘어 멀리 오기를 바라겠소”라고 하면서 표정이 달라진다.

 

그 마음이 이해될 법하다. 이런 재촉 때문에 초의는 다섯 차례나 제주를 찾았던 것이다. 말이 다섯 차례지 당시 제주바다를 넘는 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만났지만 헤어지고 나면 추사의 갈증은 가라앉기보다 더 심해져 “한창 생각이 간절하다”고 토로를 한다. 서로 사모하는 만남이란 원래 그런 것인지 간절함이 연인 사이보다 더하다.

 

초의는 다와 선이 둘이 아니며 선과 시가 둘이 아니라하는 불이(不二)의 사상을 펼침과 동시에 차 관련 서적으로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작했다. 특히 백파의 ‘선문수경(禪門手鏡)’을 반박한 ‘사변만화(四辨漫話)’로 유명했다. 추사는 이러한 초의로부터 선 학풍의 영향을 받았다.

 

추사는 30살에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의 소개로 동갑인 초의를 만났다. 초의는 제주도에 있는 추사에게 제자 허련을 통해 손수 법제한 차를 보내고, 추사는 초의에게 그 유명한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편액 글자를 써 보내기도 했다.

 

초의가 제주도를 찾았을 때 추사는 강정에 사는 어부로부터 얻은 은어를 대접하려 했다. 그러나 밤새 쥐들에게 은어를 도둑을 맞았던 모양이다. ‘은어 쥐에게 도둑맞고서 초의에게 보이다(銀魚爲鼠?示艸衣五)’는 초의와 추사의 만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시다. 원래 이 시는 은어라는 별미를 통해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절실한 소망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망이 좌절되었을 때 그것을 삭이는 여유를 보임으로써 그 소망을 탐욕이 아닌 정당하고 건강한 욕구로 형상화해 내고 있다.

 

그런데 ‘추사에 미치다’의 저자 이상국은 이 시에 대해 “강이 나오는 것을 보면 제주 유배에서 돌아와 한강변에 살던 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문제는 ‘래자강정어자가(來自江亭漁子家)’이라는 구절인데 이상국은 강정(江亭)을 “강가에 있는 정자”로 해석하지만 필자는 “강정에 사는 어부네 집에서 보내온 것이네”라고 해석하여 강정(江亭)이란 현재 서귀포시 강정(江汀)을 지칭한다고 보았다.

 

추사의 또 다른 시 가운데 ‘구호칠절증강정김생(口號七絶贈江亭金生)’에서도 강정이 나오는데 이 시는 당대의 제주도 교육환경을 지적한 것으로서 관련된 편지도 있거니와 특히 이 시의 “노인성 아래 작은 창이 환하구려”라는 표현을 통해 그 위치가 제주도임을 드러내고 있어 더욱 그렇다.

 

초의는 조선 말기 사회의 고뇌 속에서 승려로서는 드물게 자기 시대 분위기의 최첨단을 호흡하며,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참뜻을 이해한 승려였다. 이러한 초의는 추사에게 실학적 불교를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소치(小癡) 허련(許維)
한편 초의는 허련을 추사에게 소개하여 남종화를 본 괘도에 오르게 한다.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허련을 칭찬했다. 이런 추사를 만나기 위해 그는 초의가 제다한 차를 가지고 3번씩이나 제주도를 찾았다.

 

그는 헌종7년(1841) 2월부터 6월 초에 처음 내도하여 4개월 동안 스승의 수발을 들었다. 이때 “나는 추사선생의 적소에 계속 함께 있으면서 그림 그리기, 시 읊기, 글씨 연습 등의 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만남은 감동 그 자체다.

 

헌종9년(1843) 7월부터는 제주목사 이용현을 따라와 10여 개월을 내왕하며 추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1843년에 제작된 ‘소치화품(小癡畵品)’은 허련이 두 번째 추사를 찾아가서 그린 후 만든 화첩이다. 이 그림들 가운데 제주의 실경을 그린 그림으로 ‘오백장군암도(五百將軍巖圖)’가 눈에 뛴다. 뒤쪽 멀리 한라산이 구름 속에 솟아 있는 가운데 마치 바위들이 도열한 것 같은 경치를 그린 이 그림은 한라산 정상 남서쪽 영실계곡의 기암군을 그린 것이다.

 

이 시기에 허련은 8폭의 산수화를 남겼는데, 추사를 모시고 있던 강위가 제를 썼다. 말하자면 허련과 강위의 합작품이 제주도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때 추사는 허련으로부터 초상화도 그려 받게 되는데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중국의 소동파(蘇東坡:1036~1101)가 혜주에 유배되었을 때 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평복 차림의 모습을 그린 ‘동파입극도’를 모방한 것이다.

 

추사는 소동파를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청나라를 다녀와 옹방강?완원 등과 교류하던 추사는 이들로부터 동파입극상을 선물 받아 즐기며, 그의 여러 제자들에게 동파입극도를 그리게 한다. 동파입극도를 즐겨 그렸던 허련은 어느 날 동파입극도의 얼굴 모습을 스승인 추사의 얼굴로 바꾸어 그려 추사의 동파를 향한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제주도에 비바람 무릅쓰고 찾아가 만난 스승의 모습이 소동파의 모습처럼 보였을까? 낙향에 있던 스승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참된 제자의 스승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양진건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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