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찾으면 묵향 그윽한 작품 감상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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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저지리에‘먹글이 있는 집’준공
제주말씨 아는이들은 제주어 작품에 큰 흥미
한곬 작품 외에도 국내외 유명작가 작품 전시
▲ 2003년 7월 저지문화예술인마을 ‘먹글이 있는 집’ 전시관 개관식을 열었다. 사진 오른쪽부터 고 양중해 박사, 현화진 의장, 조종숙 선생, 권오실 선생, 신철주 군수, 신두영 선생, 김경택 부지사 등이 앉아 있다.

■ 희망을 담은 서예전시관을 짓고
2003년 2월 28일. 교직 44년을 마감하고 자유인이 되던 날, 황조근정훈장을 목에 걸고 동화초등학교 교문을 나섰다.

 

오랜 기간 열정을 쏟아온 교단이라 그 자리를 떠나는 마음이야 섭섭함도 없지 않았지만 새로운 먹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희망에 찬 포부가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퇴직하면 도심에서 뚝 떨어진 곳에 가서 혼자서만 작업할 수 있는 창작실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이 우선 앞섰다. 그러던 중 당시 북제주군 신철주 군수의 청과 김창우씨와 변항봉 저지리장의 방문 권유에 의해 새로 조성되는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자리 잡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경면 저지리 2114-58번지. 가시나무 엉클어진 숲속에 1031평의 새 부지를 마련하고, 여기에 내가 앞으로 먹에 묻혀 붓과 함께 씨름할 서예전시관을 짓기로 했다.

 

마침내 2003년 7월 17일 준공을 보게 됐다.

 

동쪽 사람이 서쪽에 자리 잡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지만 제주에서 가장 강우량이 적고 습기가 적은 곳이라고 판단, 이곳에서 묵향을 피워보리라는 희망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염려와 의아한 시선도 받았지만, 많지 않은 퇴직금까지 쏟아부었다.

 

그래도 의기양양하게 전시장을 짓는 마음 속엔 추사 선생의 필획까지 끌어당기고 싶은 욕심도 크게 자리를 같이했다.

 

저지리의 문원숙씨 등 동네 어른들은 조성되어 가는 예술인마을에 들러 “이듼 우리 두린 때 청촐비레 댕겨난 듼디 영 멋지게 멩글아 놧구나!”라며 감탄과 함께 옛 모습을 상기하기도 했다.

 

전시장의 규모를 좀 넓게 하려고 생각했는데 관리 문제도 있고 해서 전시장 100평과 부대 공간 50평으로 줄이고 건축을 마감했다.

 

집을 짓고 첫 밤을 지내던 날. 넓은 대지에 누운 것처럼 숲 사이로 흐르는 바람결에 묻혀 자연이 주는 상쾌함을 맛보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서예관 이름은 순우리말인 ‘먹글이 있는 집’으로 정하고, 항상 문이 열려 있어 전시장을 찾는 이들에게 언제든지 서예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예인생은 70세가 고비라고 하는데 필력이 약해지기 전에 작품다운 작품이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비장한 각오도 한편 생겨났다.


■ ‘먹글이 있는 집’ 문 열던 날
예술의 길은 고행 길이라고 하는데 이를 각오하고 집을 떠나 숲속을 택해 수행 아닌 고독의 길로 들어섰지만 굳이 이 길을 택한 것은 예술가로서 한 가닥 보람을 쌓아보겠다는 결심이 있었기에 주저 않고 나선 것이다.

 

2003년 7월 17일 열린 개인 전시관 개관이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서는 처음이다 보니 개관식 규모에도 걱정을 많이 했다. 너무 초라해서도 안 되겠기에 서울의 예술가들을 초청하기로 했다.

 

필자가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을 때 심사를 했던 규당 조종숙 선생, 늘샘 권오실 선생을 비롯해 한별 신두영 선생, 죽마고우처럼 많은 도움을 주었던 문곡 박병천 교수, 전각의 달인 석운 이영수 선생 등 유명한 작가들이 먼 곳을 마다치 않고 참석해 자리가 한층 빛났다.

 

도내 인사로는 김태환 도지사, 신철주 군수를 비롯한 기관장, 내빈, 선후배 서예가, 친구, 친지, 문하생 등 많은 분들이 찾아 격려를 해줘 궂은 날씨에도 성대한 개관식을 치렀다.

 

개관 전시작품은 향토색 짙은 ‘제주말씨우리글서예전’으로 ‘매날매날 지꺼지게’ ‘족아도 아지망’ ‘어욱밧디 생이소리’ ‘허천 베레지 말라’ ‘셔도 걱정 읏어도 걱정’ ‘주멩기가 커사 하영 담나’ ‘이녁집 식게 몰르멍 놈의 집 식게 알카’ 등 제주 한글서예가들의 작품이 전시됐다.

 

제주 말씨를 아는 도내 내빈들은 재미있게 관람하는가 하면 서울에서 온 작가들은 읽을 수 없는 작품이라서 대충 보고 넘어가는 모습이었다.

 

이곳 예술인마을에도 같은 해 규당 조종숙 선생이 먹향기나눔터를, 방한숙 선생이 야생화전시장인 방림원을 속속 개관했다. 이듬해에는 계정 민이식 선생이 연고재를, 소운 이송자 선생이 송뢰헌을, 동강 조수호 선생이 탐묵헌을, 소심 인민아 선생이 소심사랑을 열었다.

 

또 김현숙 선생이 한국화 작업실을, 양의숙 선생이 선장헌을, 양순자 선생이 몽생이작업실을, 박광진 선생이 진갤러리를, 박서보 선생이 서양화 작업실을 각각 마련했다.

 

이들 작가 외에도 박석원 선생, 김경선 선생, 김경수 선생, 고영훈 선생, 안영모 선생, 이창원 선생, 고경헌 선생, 조건수 선생 등이 작업실을 갖췄다.

 

최근 들어서는 이명복 선생이 갤러리 노리를 지은 것과 더불어 유현수 선생이 문예창작작업실을 마련했고, 아울러 제주현대미술관이 들어서면서 김흥수 화백의 작품전시실까지 갖추게 되어 예술인마을의 면모가 차츰 갖추어져 가고 있다.


■ 숲속 적막한 곳에 서예전시관
낮에는 크고 작은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와 쌍쌍이 날아드는 까투리와 장끼들을 벗 삼아, 밤에는 가냘픈 풀벌레들의 울음소리와 컹컹 짖는 노루들의 짝궁 찾는 소리를 들으며 유유자적 먹향기 속에 창작의 시간을 행복(?)의 시간으로 지내온 지 어언 8년이 지났다.

 

이곳은 숲속 적막한 곳에 있는 전시관이라서 찾는 분들 이야기로는 보기 드물게 느낌이 새롭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한 여러 언론사 기자들이 남긴 글들을 잠깐 모아봤다.


- 오직 한길 한글서예에만 정진해온 한 예술인이 제2의 인생을 꽃피우고 있다.

 

- 제주도 한경면 저지리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집단 군락을 만들어 생활하는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 있다.

 

- ‘먹글이 있는 집’은 한곬 선생이 두 가지 바람으로 마련된 곳이다. 그 한 가지는 제주에 서예 전문 전시관이 없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작업실 겸 전시관을 마련하여 도민과 관광객 들에게 한글서예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 ‘먹글이 있는 집’은 언제 어느 때고 이 집을 방문하면 묵향 그윽한 서예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곳 주인장인 한곬 현병찬씨의 서예사랑, 한글사랑이 그대로 느껴지는 갤러리 이름이다.

 

- 전시회가 끝났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집 이름이 말해주듯 항상 작품들이 내걸려 있는데 현씨가 사제를 털어 구입한 애장품이 그것이다.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원곡 김기승, 소암 현중화, 해정 박태준, 규당 조종숙, 평보 서희환, 검여 유희강, 여산 권갑석, 갈물 이철경, 꽃뜰 이미경, 정안당 신정희, 늘샘 권오실, 구당 여원구, 초정 권창윤, 동정 박세림, 무림 김영기, 산돌 조용선, 아람 이한순, 송하 김정묵, 신계 김준섭, 계정 민이식, 학정 이돈홍, 무곡 최석화, 김창동, 한국화가 문봉선, 중국작가 양산 오명남.장문선 등 작품마다 깃들인 사연도 제각각이다.

 

-산중에 꼭꼭 숨었던 갤러리에는 서예계의 제왕으로 일컫는 김응현 선생과 중국 서법가협회 주석 심붕, 그리고 외국화가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이곳을 기웃거렸다. 특히 이곳을 찾았던 6명의 프랑스 드로잉화가들은 즉석에서 먹물 크로키를 선봬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먹글이 있는 집’을 방문한 기자들마다 과찬의 말들을 아낌없이 남겨줘 마음 속으로 깊이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곳이 내 생에 보람을 쌓는 곳으로, 훗날에는 여러 관심 있는 분들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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