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제주 관광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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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 제주 방문 후 최고 관광지로 신기원 개막
1961~1965년 제주 관광객 7배 가량 폭발적 증가
관광객들‘돼지화장실’에 놀라…개량사업 추진
고급 관광호텔 신축 위해 재일교포 투자자 물색
▲ 제주시의 주요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면서 도민들은 물론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됐다. 사진은 1962년 도내에서 최초로 등장한 제주시 시내버스 개통식 현장.

■ 제주도관광협회 발족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제주를 방문해 제주관광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고 큰 관심을 나타내며 관광개발 사업추진을 약속한 이후 제주도는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혁명정부 출범이후인 1961년 8월 관광사업진흥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각 시도별로 관광협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제주도는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관심을 갖게 됐다.

 

내가 처음 도지사에 부임할 당시만 해도 제주도내 관광사업자는 백형석씨가 운영하는 임의단체인 제주관광사업협회와 이규동씨가 설립한 제주도관광안내소의 후신인 대한여행사 제주지사 정도에 불과했다.

 

혁명정부의 최고위원, 장관, 고위 관료 등 중요한 요인들이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나는 백형석씨에게 제주관광안내를 맡기며 제주관광홍보역할을 다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당시의 제주관광여행 코스는 관광코스는 용두암-협재굴-쌍용굴-산방굴사-안덕계곡-천제연폭포-감귤원-외돌개-천지연폭포-정방폭포-5.16횡단도로-삼성혈-제주시로 돌아오는 자연경관 관람이었다.

 

서귀포 남제주군청 뒤 강창학씨가 돌로 쌓아올린 10여 미터의 전망대는 서귀포일대 감귤 밭 전경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에게는 인기만점 이었다.

 

이 중간에 오현단과 주정공장, 관덕정을 둘러보기도 했는데 관덕정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당시 제주도에는 전국 최초로 관광안내원이 활동했다는 점이다.

 

백형석씨가 운영하던 관광사업협회가 1961년 처음으로 관광안내원 3명을 공개 채용했는데 김경희 오신자 김영희씨가 그 주인공들이다.

 

혁명정부 출범이후 제주도에 대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관심이 크다는 것을 안 혁명정부의 요인은 물론 산업시찰단, 학술연구조사단, 도민생활시찰단 등 단체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관광안내원들이 이들을 맞았음은 물론이다.

 

이와함께 제주도에서도 전국체전 등 다른 지방 대규모 행사에 관광홍보요원을 파견했고 1962년에는 서울에서 제주도관광전시회가 열려 제주도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1961년 10월에는 국민재건운동본부에서 연예단 일행 30명을 제주도에 공연차 내려 보내면서 제주도를 국민관광의 최적지로 홍보했다.

 

이외에 김옥현씨가 운영하던 남일여객, 고태식씨의 제주여객, 강창용씨의 영주여객 등 교통업체, 이동규씨의 관광토산품업체가 그나마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제주도의 관광발전 잠재력이 어느 지역보다 크다고 보고 이들에게 관광협회의 조직을 만들 것을 조언했다.

 

그 결과 1961년 11월 6일 제주도청 총무국장실에서 강우준 제주신보사장, 백형석 대한여행사제주지사장, 홍종언 제주상공회의소회장, 김옥현 남일여객 대표, 김영진 제주산악안전대장, 강창용 영주여객 대표, 이인구 제주해운조합대표, 이동규 흑산호공예협회/제주관광안내소대표, 김병헌 전 문총제주지부대표, 박태훈 대한해운공사제주대리점 대표 등 10명이 모여 제주도관광협회 발기인 총회를 열고 홍종언회장을 발기인 대표로 추대했다.

 

4일 뒤인 11월10일 제주시청 회의실에서 홍순만 제주도청 공보계장이 사회로 제주도관광협회 창립총회를 열고 강우준 사장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때 나는 이호경 도지사보좌관을 보내 축사를 하고 제주관광발전의 선도역할을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제주도관광협회는 다음해인 1962년 2월 교통부장관으로부터 정식 승인받아 사단법인으로 등록됐다.

 

1961년의 제주도에 온 관광객 수는 1만1178명(외국인 190)이었는데 1965년에는 내국인 7만4407명에 외국인 1574명 등 7만5901명으로 관광객이 7배가량 증가할 정도로 제주관광은 폭발적으로 발전양상을 보였다.

 

제주도과 관광의 메카인 것은 1962년 3월15일 제주도청에서 전국 관광담당관회의가 열림으로써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관광은 이때부터 국내 제일의 관광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셈이다.


■ 관광산업 기반조성에 힘쓰다
도지사로 부임하던 해 미국 하와이에서 제주도에 온 관광객이 나보고 ‘도지사 양반, 여기에 외국사람 어떻게 관광하러 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화장실이 큰 문제다. 돼지가 다 보인다’고 제주의 화장실 문제를 내게 따졌다.

 

사실 제주도의 화장실은 내가 보기에도 참 불편한 문제였다. 육지 관광객들은 제주도의 화장실을 보고 깜짝 놀라고 비웃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시내 주택은 물론 여관의 화장실도 돼지가 있는 변소였다. 관광객을 제주도로 유치하기 위해선 화장실 문제를 어떻게 하든지 해결해야할 현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관에서 시멘트를 지원해주면서 화장실 개량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우선 제주시와 서귀포시 도심지 주택을 대상으로 1차로 추진했는데 700여개소에 이르렀다.

 

다음은 관광객들이 묵을 호텔문제였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도 제주시내에 호텔이 없어서 도지사 공관에서 잠을 잘 정도였으니까 제주관광을 위해선 고급 관광호텔이 반드시 들어서야 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정부가 지어 민간에 임대해 운영하던 서귀포관광호텔이 유일한 호텔이었는데 규모가 8실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제주도 관광개발사업에 투자할 자본가나 업체를 찾아야 했는데 제주출신 재일교포 투자자를 주목했다.
그리고 도내 도로망이었다.

 

전도에 포장된 도로가 1m도 없으니 차량운행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있는 시내의 도로는 좁고 제주시 외곽도로는 일주도로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 개설이었다.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한라산의 비경을 관광상품으로 선보이고 제주시-서귀포시간 이동시간을 1시간대로 줄여 전도 1일 생활권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또 제주도와 육지간 연계교통수단의 확충이 반드시 필요했다.

 

제주도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선 편리한 교통수단 확보가 필수적인 문제였다.

 

이점을 염두에 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도 제주방문시 제주해협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대형 여객선을 투입하겠다고 도민들에게 약속했던 것이다.

 

항공기의 매일 운항과 대형 여객선의 제주노선 투입은 제주관광발전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야 내가 제주도를 하와이나 홍콩과 같은 국제관광지로 발전시키는 구상이 실현 될 수 있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제주항에 대형 여객선이 입항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큰 암초 때문이라는 보고를 받고 나는 해군에 암초 제거를 요청했다.

 

해군에서는 11월28일 해군 UDT대원 30명을 제주도에 보내줬고 해군 UDT대원들은 1962년 7월18일까지 3차에 걸쳐 제주항에 있던 암초를 폭파해 완전 제거함으로써 3천톤급 대형 선박의 입항을 가능케 했다.

 

또 백형석씨가 내게 육지에서 구입한 전세버스를 제주도에 싣고 와야 하는데 싣고 올 방법이 없다며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때도 해군 수송함을 통해 실어온 적이 있다.

 

이렇게 해군은 제주발전의 중요한 길목마다 흔쾌히 나섰다는 것을 제주도민들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yjkang2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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