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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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말 중국(청나라)과 외교와 교역을 트는 임무를 맡고 중국에 건너온 영국 외교관 매카트니 백작이 중국 황제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매카트니가 황제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사자(영국 왕실의 상징)가 한 마리 뱀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 매카트니는 청나라 왕실의 상징인 ‘용(龍)’에 대해 지식이 없었던지 용을 뱀으로 표현했다.

결국 이 회담은 결렬됐고 중국과 영국의 외교관계는 반세기나 더 늦어졌다.

▲우리나라 국기가 하마터면 ‘용’이 될 뻔했다.

원래 우리나라는 국기가 없었다.

18세기말 미국과 한미수교조약을 준비하고 있을 때 처음 국기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 때 우리나라에 와 있었던 중국 대신 마건충(馬建忠)이 이를 알고 국기도안을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국기 바탕은 흰 빛으로 하여 백성을 나타내고, 푸른 구름을 아래로 깔아 관원(官員)을 나타내며, 그 위에 붉은 용을 그려 임금을 나타냄으로써 군관민(君官民)의 조화를 표방하자고 했다.

당시 중국의 국기는 커다란 용을 그렸다.

▲다만, 우리나라 국기의 용은 중국 국기의 용과 구별하기 위해서 용 발톱을 중국 용처럼 다섯 개로 하지 말고 네 개로 하라는 것이었다.

중국측의 의도는 우리나라를 중국의 속국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우리측이 이를 간파하고 홍룡청운(紅龍靑雲)은 그리기가 번잡스럽다고 하고, 태극. 팔괘안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태극의 반쪽인 붉은 색이 바로 붉은 용(紅龍)이요, 아래 반쪽인 푸른색이 푸른 구름(靑雲)이며, 둘레의 팔괘는 조선 8도를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 태극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은 이런 국기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잘 몰랐다.

그런 태극기가 국민의 구심체가 된 것은 3.1만세운동 때 였을 것이다.

그 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태극기가 올랐을 때 민족 심정의 공약수가 그토록 그 깃발에 농축됐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 독도에 가는 사람마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역사를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힘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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