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제주인의 꽃’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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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훈 前 제주도문인협회장/시인

멀리 광주에 사는 작가 신동규님으로부터 한권의 소설집이 우송되어왔다. 그의 신작 ‘순비기꽃’이다. 제주 성산포에는 ‘앞바르’라는 지명을 갖고 있는 바닷가 모래밭이 있다. 일출봉과 섭지코지를 잇는 장장 4∼5km의 모래밭 해안가다. 작가는 그의 작품 소재를 이곳에서 자생하는 ‘순비기꽃’에서 찾았다. ‘순비기’는 제주도 바닷가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척박한 모래밭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다 못해 모래밭의 사방(砂防)사 역할도 함께한다. 그만큼 그는 인동초보다도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제주에선 ‘순비기’를 ‘숨비기’라 부른다. 그 답은 7∼9월의 제주바닷가를 나가보면 안다. 제주해녀들이 질긴 ‘숨비질’소리가 들릴 때마다 폴짝 폴짝 피워대는 연보라 자주 빛의 ‘숨비기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해녀들이 목숨 건 숨비질 과 함께 피어대는 숨비기꽃, 그것은 필시 생명의 재탄생을 실현시키는 제주해녀들의 혼이며 제주인의 정신이다. <‘순비기꽃’은 ‘제주도민의 꽃’>이라고 역설하는 작품 속 화자의 주장은 이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어디 이뿐인가 평생 바다와 함께 삶을 살아온 제주인의 정서가 '그리움'인 것처럼 ‘숨비기’ 꽃말도 '그리움'인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작품의 배경이 된 성산포 ‘앞바르’는 제주4·3사건 때 이 지역 양민들을 집단 학살시켰던 장소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곳의 ‘숨비기’를 양민이 흘린 피를 먹고 자란 나무라고 했고 그 ‘숨비기꽃’은 그들의 혼이라고 했다, 한여름 내내 죽은 자의 혼 불처럼 피워대던 ‘숨비기꽃’, 그러나 지금 이곳엔 그날의 아픈 흔적도, 한 맺힌 ‘숨비기꽃’의 사연도 없다. 있다면 세계자연유산인 일출봉과 섭지코지라는 관광지를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해안선과 철석 대는 파도와 해녀들이 휘파람소리와 이를 바라보는 관광객들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한 가지 있다면 지난해 이 지역 4·3희생자 유족들이 세워놓은 조그만 ‘4·3희생자위령비’의 쓸쓸함이다.

 

그 많던 ‘숨비기’넝쿨도 이제는 댕그라니 뿌리를 들어낸 체 앙상하고 햇빛에 반짝이던 모래톱도 물살에 쓸려가거나 바람결에 올올이 흩어져 불안하다. 머지않아 있을 이곳의 폐허가 눈앞에 선하다. 더더욱 안쓰러운 것은 어디에서 뽑혀와 심어졌는지 모를 거대한 자연석들이다. 어느 청년단체, 봉사단체를 알리는 표석, 마을과 관광지명 등이 새겨진 표석들로 둔갑해서 함부로 새워져 있는 것들, 어느 산허리 바위틈에나 있음직한 그것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선사시대의 거석문화를 보는 듯 가슴이 답답하다. 그렇다고 제주해녀들의 애환이 담긴 ‘숨비기’에 관한 해설이나 이들을 보호하는 팻말 하나 새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 검질기게 뿌리내렸던 성산포 앞바르 ‘숨비기’ 군락지, 세계적 관광지인 일출봉과 함께 제주4·3의 아픈 상처까지 안고 있는 이곳은 도로 확장공사라는 미명아래 그 아픈 역사 현장의 일부가 잘려 나간 지 이미 오래고, 무심한 올래꾼들이 수없이 밟고 지나간 발톱에 모래언덕들마저 무참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더구나 사려 깊지 못한 체 새워진 표석들은 제주제일의 아름다운 경관마저 그늘지게 하고 있으니 오늘따라 ‘숨비기’잎에 숨어사는 바람과 파도와 해녀들의 숨비질 소리가 내 안에서 슬프도록 처량하다. 떼 지어 지나가는 올레꾼들이나, 본디 올레길을 열어놓은 책임 있는 분들이나, 또 그들만의 표석을 세워놓은 단체의 책임자도, 관계당국도 이 일에 관심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래도 늦었지만 이 지역의 제반 사항 중 일부인 사방공사라도 시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얼마나 이곳 정서에 맞는 시공이 될지, 다른 사안들은 어떻게 될 건지에 대해서도 함께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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