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갖가지 질병 극복하고 마침내 추사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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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질환 이겨내려 제주전복 이용한 치료법 남겨
인삼 섭취, 단전호흡 실천은 추사의 장수 비법
지인들과 지속적 차 교류…초의의 제다법 조언
▲ 추사유배길에 조성된 ‘다문’이라는 차와 관련된 추사의 또 다른 호가 새겨진 입석.

□ 잦은 질병
적막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추사는 잦은 질병으로 고생을 많이 한다. 추사는 눈병, 다리의 병, 소화불량증 등을 호소했다. 환갑에 가까운 몸으로 이역의 제주도에서 적응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침과 혈담으로 고생을 했고 특히 눈의 아픔을 호소했다. 특히 눈이 자주 아팠던 관계로 “근래에는 안질이 더욱 심해짐으로 인하여 도저히 붓대를 잡고 글씨를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추사는 직접 ‘안질조치대법(眼疾調治大法)’을 남겼다. 안질의 증상과 원인, 치료법 등을 항목별로 자세히 설명한 글이다. 얼마나 눈이 불편했으면 이런 치료법을 본인이 직접 썼겠는가. 이 가운데 석결명과법(石決明?法)은 제주도와 관련이 깊다. 석결명이란 제주도에서 많이 나는 전복을 말하며 예로부터 약재로 쓰였다. “전복 살은 맛이 짜고 성질은 서늘한데 눈을 썩 잘 밝게 하고 껍질로는 예막을 삭힌다”고 했다. 예막이란 눈에 끼는 백태를 말하는데 이를 없애기 위해 전복 껍질을 밀가루 반죽에 싸서 잿불에 묻어 구워 익혀 쓰거나, 소금물에 삶아서 보드랍게 가루 내어 쓴다고 했다.

 

추사는 아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과로를 했을 때 입안이 해어지고 혓바늘이 돋기도 하고 입술 주위에 물집이 잡히기도 하는 구창은 물론 담체(가래로 막히는 것)로도 고생했다. 그런가하면 피풍도 심했다. 피풍이란 피부에 발진 없이 심한 가려움증이 있는 이른바 피부소양증이다. 추사는 노인성 피부소양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피풍으로 가려움이 심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잦은 질병 가운데서도 엄청난 독서를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추사체를 완성했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치명적인 병이 아니라면 잦은 질병은 오히려 기회이고 복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관리하며 자신을 완성하는 일이야말로 추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범 가운데 하나다.

□ 건강관리
이렇게 아프다보니 당연히 상비약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추사는 부인에게 건위제로 이용되는 계피와 진해, 이뇨 및 강장제로 애용되는 천문동을 보내달라고 하고 수수엿도 요구했다. 그런데 요청한 것 가운데 귤껍질도 있다. 제주도에 살면서 귤껍질을 요구했다니 얼른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제주감귤은 조선시대 조정으로 올리는 별공(別貢) 진상품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아무나 따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자 즉 잣과 호두, 그리고 곶감 등을 보내달라고 했다. 잣, 호두 등의 견과류는 건강식품이자 중요한 기호식품이었기 때문에 곶감과 함께 추사가 제주도에서 즐겼던 것 같다. 추사가 특히 장복했던 것은 인삼이었다. 어느 정도인가하면 “다만 인삼을 배추나 무 씹듯이 할 뿐이오”라고 했다. 그러가하면 “엿냥의 인삼을 두 사발씩이나 마시며”라고도 했으니 그 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추사에게 이런 인삼의 힘을 제공해준 사람은 식구 외에 친구 권돈인이 있었다. 실낱같은 목숨을 연장시켜준 그의 배려에 대한 고마움이 애절하다. 권돈인은 인삼 외에도 담배도 보내주었는데 담배를 풍토병인 습하고 더운 땅에서 나온 독기를 막는 약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친구인 권돈인 외에도 제주목사 장인식도 가까이서 추사에게 인삼을 제공해 준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도움으로 추사는 인삼을 복용하면서 병치레를 견디어 낸다.

 

그리고 허련이 그린 초상화 ‘해천일립상’을 보면 추사는 왼손으로 수염을 어루만지고 오른손으로는 배꼽 근처를 움켜쥐고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연단도인의 몸짓이라고 하는데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사실 추사가 호소하는 여러 가지 질환들은 생사여탈을 결정짓는 치명적인 병이기 보다는 잔병들이다. 이런 잔병 치례를 하면서도 추사가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인삼이나 단전훈련의 덕이 컸을 것이다.

 

추사가 인삼 장복이나 단전훈련을 지속적으로 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이유는 아버지를 제외한 저의 모든 식구들이 단명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물론이고 추사 역시 건강관리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을 것이며 그 덕에 부자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차
추사가 장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인삼과 단전훈련 외에도 차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추사는 제주도에서 설사병을 차로 고치기도 했고 본인 스스로 차 덕에 수명을 연장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추사의 차에 대한 높은 안목은 옹방강과 완원과의 교유를 통해 얻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북경에 갔을 때 완원의 서재인 쌍비관에서 승설차를 맛본 후 차에 매료되어 자신의 호를 승설도인(勝雪道人)이라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축척된 추사의 차에 대한 식견과 경지는 후일 다성(茶聖)이라고 불리게 되는 초의의 제다법을 완성하는데 실제적인 조언을 가능케 하였다.

 

사실 초의는 추사와의 교유를 통해 청나라 문물에 대한 안목을 확장할 수 있었고 신학문인 고증학이나 실학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학파 경화사족과 교유를 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차의 애호층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초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추사였던 것이다. 추사는 말차를 끓이는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추사는 완당 외에 다로(茶老), 고정실주인(古鼎室主人), 승설차의 이름을 본딴 승설도인 등 차와 관련한 아호를 많이 가졌었다.

 

추사는 차를 구하기 어려운 귀양살이 동안에도 손수 덖은 차를 보내준 초의 덕에 차를 즐길 수 있었다.

 

초의에게 해마다 차를 얻어 마셨지만 그럼에도 추사의 갈증은 대단했다.

 

추사가 대흥사 사중에서 만든 단차 중에서 품질이 좋은 소단차 30, 40편을 골라서 보내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흥사에서 소단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차(團茶)란 차의 가루를 뭉쳐 만든 덩이차를 말하는데 다산 정약용도 여린 찻잎으로는 잎차를 만들고 늦게 딴 찻잎으로는 단차를 만들었다고 했다.

 

현재 제주도에는 녹차 재배단지가 여러 군데 있지만 그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이곳은 차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라는 추사의 지적처럼 당시만 하더라도 제주도에서 차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제주도의 차 문화는 추사와 초의 덕분에 소개되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조선후기 유배인 김윤식이 다른 유배인들, 그리고 제주도 지식인들과 조직했던 ‘귤림’이라는 시회(詩會) 활동 등에서 제주도의 차문화가 본격적으로 성숙되기는 했지만 당대의 척박한 제주도의 환경 탓에 여전히 한정된 몇 사람만이 향유하는 고급문화일 수밖에 없었다. <양진건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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