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한라산횡단도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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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의장‘한라산 횡단도로 승인, 43㎞는 제주 대역사’
김한준 국장·홍성림 과장 주도해 한라산 횡단도로 공사 진행
김형욱 최고의원·김용태 고문·김영관 지사 기공식 첫 삽떠
▲ 제주도 길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한라산 횡단도로 개설 포장사업 기공식이 1962년 3월24일 제주도청 앞 공설운동장에서 2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횡단도로 건설의 실무 주역>
한라산 횡단도로 공사는 김한준 산업개발국장과 홍성림 건설과장의 책임아래 이뤄졌는데 이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너무 고맙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제주도 일주도로 순시를 마치고 제주시에 도착, 도청에서 나에게 제주발전을 앞당기고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도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한시간내에 왕래할 수 있는 연결도로로 한라산 횡단도로를 개설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박의장은 나에게 횡단도로 사업을 책임지고 수행할 수 있는 모험적이고 유능한 간부를 추천 하라고 했다.

 

이에 나는 당시 제주도청 학무과장과 서무과장, 북제주 군수를 거친 김한준 도 지방과장을 추천했다. 이를 보고받은 박의장은 즉석에서 내무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김과장을 서기관으로 국장 승진시키라고 지시했다. 그의 업무능력과 추진력을 감안할때 당연한 지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라산 횡단도로등 제주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그보직을 산업국장에서 산업개발국으로 보직명칭을 변경해 발령했다. 1962년에 산업개발국장으로 승진한 김국장은 당시 사업을 함께 할 동료로 당시 홍성림씨를 건설과장으로 추천했다. 김국장과 홍국장은 이후 제주개발사의 역사적인 제1횡단도로 건설 사업의 중책을 맡아 기공식을 가졌고, 1년 8개월에 걸친 공사끝에 준공했다.

 

김국장이 김두현 제주도 초대총무국장의 장남이라는 사실은 후에 알았다. 김두현 총무국장은 내가 해군 중령 당시 처음 제주도에 중국대사를 LST함정으로 모시고 왔을때 우리를 안내했고 따뜻하게 맞이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두현 총무국장은 제주 4·3 사건때 괴한들에 납치, 테러에 의해 재직중 순직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 당시 도 직제는 지사 밑에 총무국·산업국 2국 체제였다. 그후 횡단도로 개설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공로를 박의장으로 부터 인정 받고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부친에 이어 제14대 총무국장으로 영전됐다. 또 제주시장으로 승진후 제주도 공직사회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부산광역시 산업국장으로 전출, 재무국장, 중구청장, 서구청장, 영도구청장, 동구청장 등을 역임한 후 정년퇴임으며, 64세 젊은 연세에 작고하셨다는 얘기를 전해들어 대단히 슬펐다.

 

지난회 연재때도 거론했지만 고인이 된 김한준 국장은 현 제주일보 김대성 회장과 김대우 사장의 선친으로, 나와 김국장의 가문은 3대에 걸쳐 인연을 맺고있다. 나는 공사가 지연되거나 차질을 빚을 때마다 홍성림 과장에게 야단도 많이 치고 했는데 제주도를 떠난 한참 후에 홍 과장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났다. 홍 과장이 수고한 것을 내가 가장 잘 알았으니까. 홍성림 과장은 정말 성실하고 훌륭한 공무원이었다.

 

이들 제주도 공무원들의 눈물겨운 노력덕분에 제주도 건설예산은 충청도보다 많아져서 다른 지역으로부터 시샘과 견제를 많이 받기도 했다.


<도로건설비 확보위해 서울출장>
제주시내 도로포장이 이뤄지자 제주도민들의 포장도로의 편리함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한라산 횡단도로의 개설과 포장에 대한 기대감도 더 커져갔다.

 

나는 한라산 횡단도로 개설포장을 시작으로 한 제주도에서 길의 혁명 다음 단계를 구상했다.
한라산 횡단도로가 개설 포장될 경우 관음사와 탐라계곡 사이에 차도를 설치하고 탐라계곡에서 한라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인도를 만들어 한라산 등산을 1일 등반으로 단축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는 매년 증가하는 등산객과 학술조사단의 현지답사 편의를 위해 오전 중에 정상에 도착하고 오후에는 제주시로 돌아 올수 있는 코스를 만들고 싶었다.

 

이에 따라 나는 1962년 들어서면서부터 서울 출장을 자주 해야 했고 제주도의 도로건설비를 확보하기 위해 중앙부처의 건설관련 부처를 모조리 찾아다녔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제주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고 한라산 횡단도로 건설사업을 승인하면서 중앙의 중요인사들이 제주방문도 잦아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인 이주일 육군소장과 최고회의의장 고문인 신직수, 최세경, 성창환이 다녀갔고 송요찬 내각수반은 물론 조시형 국회내무위원장, 김동하 국회재경위원장, 박태준 최고회의위원 등이 제주도를 잇따라 방문했다.

 

나는 이들에게 횡단도로 포장사업이야말로 군사정부가 도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절대적인 사업일뿐만아니라 4·3으로 인해 상처받은 제주도민들을 위로할 수 있는 보상사업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횡단도로 기공식, 전국 중계>
드디어 제주도의 길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한라산 횡단도로 개설 포장사업 기공식이 1962년 3월24일 거행됐다.

 

오후 2시 제주도청 앞 공설운동장에서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공식에는 김형욱 최고위원과 김용태 고문 등이 참석해 제주지역들과 함께 역사적인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특히 이날 기공식은 전국에 실황중계될 정도로 혁명정부의 중요한 사업으로 여겨졌으며 당시 국내 최고 인기가수인 송민도, 도미, 박재란 등을 비롯해 해군함에 의해 수송된 해군군악대와 의장대, 해병고적대 등이 축하공연을 할 정도로 화려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김형욱 최고위원이 대신 읽은 치사를 통해 “43km의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공사는 제주도의 산업과 문화발전을 기약하는 대역사이며 이를 계기로 바람 많고 여자와 돌이 많다는 제주의 삼다를 재물과 자원과 아름다움이 많은 삼다로 바꿔 나가자”고 당부했다.

 

나는 기념사를 통해 횡단도로 포장공사의 기공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특별한 배려와 지원 덕분임을 강조했다. 나는 또 한라산 횡단도로는 첫째 일주도로에서 4시간 이상 걸리던 제주-서귀포간 거리를 2시간 이내로 단축할 수 있게 됐다는 점, 둘째 한라 산록의 광활한 유휴지를 개발할 수 있다는 점, 셋째 횡단도로 주변의 수종을 갱신해 용재림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을 들며 이 공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또 중산지대의 목야지를 개간해 축산을 장려할 수 있고 표고버섯 등 특용작물의 대량재배가 가능하고 수천여종의 식물의 보호육성과 수 백 종의 약초를 재배할 수 있으며 한라산을 관광지로 적극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서독이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듯이 우리 제주도도 한라산의 기적을 이룩하자고 도민들에게 호소했다.

<충청도보다 많은 제주도 건설예산>
이때 시작된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공사는 제주도청에서 산천단까지의 7km 구간이었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토목건설업체인 삼부토건에게 맡겨졌다.

 

지금에 와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는데 일부에서는 한라산 횡단도로 공사에 폭력배들을 강제동원해 공사를 추진했다는 얘기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한라산 횡단도로 공사는 일반인들이 공사에 참여해 국가예산으로 정당한 노임을 지급받았다는 점이다.
한라산 횡단도로는 해발 750m의 고지대를 관통해야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고지대 도로공사였다.

 

경부고속도가 건설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으니까 우리나라 도로시공사에 있어서도 한라산 횡단도로 개설 포장사업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한라산 횡단도로 공사를 통해 익힌 도로공사 토목기술들이 경부고속도는 물론 많은 난공사에 적용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고 이 공사를 맡았던 업체나 담당 공무원들은 고생이 막심했다. 다행히 한라산 횡단도로 사업을 하면서 큰 인명사고 없이 추진된 것 역시 이들 공무원의 역할이 컸다.

 

당시만 해도 행정이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인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비록 승인하고 혁명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중앙정부 관료들과 상대해야 했던 실무자 입장은 또 달랐기 때문이다.

 

전국 지방장관회의가 열렸을 때인데 예산문제가 나와서 충청북도 도지사가 제주도 건설예산과 비교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충청북도가 아무리 적다지만 인구 30만밖에 안되는 제주도 건설예산보다 적을 수가 있느냐가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서 내가 그런식으로 나오면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독립하겠다. 제주도가 독립하면 유엔가입은 물론 주민소득도 경기도나 충청도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맞받아치면서 웃어 넘겼다.

 

그 이후로는 제주도 건설예산에 대해 다른 시도지사들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그 정도로 혁명정부는 예산배정에 있어서 제주도에 한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했다. 정리=강영진 정치부장
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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