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사회란 링에서 운명과 치르는 복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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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로 인한 고난과 시련 딛고 어엿한 사업가 된 양찬현씨

▲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손에 목발을 끼고 사는 양찬현씨(50)는 이동통신회사 대리점 4곳을 운영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은 힘들 것이라던 부모님 말이 떠올랐죠.”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손에 목발을 끼고 사는 양찬현씨(50)는 20대 초반께 부모가 왜 학창시절부터 전파상 차리는 방향으로 인생을 설계하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장애의 벽이 체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양씨는 제주농고 전자과를 나와 제주대학교 농업계열에 입학했다 자퇴한 후 제주전문대학 전자과에 들어갔다. “재학 중 전자기기 2급과 무선 설비 2급, 유선 설비 2급을 땄어요. 취업 때 장애를 상쇄하는데 도움 될 거라 굳게 믿었죠.” 하지만 부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비장애인은 자격증 하나 따고도 방송국, 전화국에 입사했지만 그는 선택받지 못했다. “핸디캡은 예상했지만 기대는 안 버렸는데…. 물거품이 됐죠.” 좌절감이 가슴을 후벼 팠다. 한 교수의 추천을 받아 견습생으로 근무한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에서도 시련은 비켜가지 않았다.

 

1985년 양씨는 누나가 부모에게 물려받아 운영하던 여성의류점을 넘겨받았다. “품목을 남성복으로 바꿔 남대문시장 등에서 물건을 따왔어요. 남들이 큰 가방을 어깨에 멜 때 전 질질 끌었죠.(하하하) 그때 장사의 생리를 익혔죠.”

 

사업은 현상유지에 급급했지만 양씨는 점원 이제선씨(44)와 결혼하는 ‘소득’을 올렸다. 부부는 3년간 알뜰살뜰 2000만원을 모았다.

 

양씨는 “내 길은 전자 통신에 있다”고 확신했다. “전자를 공부했고 삼성서비스센터 수리 때 현장경험을 쌓았고 옷가게로 장사도 알았잖아요. 그때 유행하던 무선전화기에 주목했어요.”

 

그는 가족 반대를 무릅쓰고 전화기 종합판매장을 차렸다. 통신공사업체도 겸영했다. 하지만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치열한 물밑 로비전이 벌어지는데 숙맥인 저는 꽝이었죠. 공사 한 건 없이 직원월급 챙기느라 거덜 직전에 몰렸죠.”

 

임대료 싼 점포로 옮기며 통신공사에 올인했지만, 끝내 반전은 없었다. “2년 만에 2000만원 몽땅 날렸죠. 속수무책이었답니다.”

 

무기력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는 2년쯤 백수로 살았다. 생계는 아내가 비디오가게로 꾸렸다.

 

1995년 양씨는 한 지인의 권유로 이동통신회사 대리점에서 일하다 1년 후 한 대리점을 인수했다. 내면에 배수진을 치고서다. “독이 오를 대로 올랐죠. 더는 물러설 곳 없다는 각오로 남들보다 30분 일찍 문 열고 그만큼 늦게 셔터를 내렸죠. 연중무휴 영업을 강행했답니다.”

 

고난의 연속이던 그의 인생에 서광이 비쳤다. 뚜렷한 이윤이 발생했고 성공예감은 가시화됐다. “통신에 관한 ‘나는 프로다’를 주문처럼 되뇄죠. 다른 사람의 상술과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양씨는 ‘황금알 낳는 거위’ 등에 올라탄 기세로 2~3년마다 신규매장을 개점했다. 현재 그는 이동통신회사 대리점 4곳과 계열점 4곳을 거느리고 있다. 연매출액은 약 30억 원이다.

 

양씨는 인생을 권투경기에 비유했다. “삶은 사회란 링에서 운명이란 상대와 벌이는 난타전입니다. 1회 2회 3회전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강한 상대를 만나게 되죠. 끝없는 담금질을 통해 스스로 펀치와 맷집을 키운 자는 12회가 끝난 후 승리란 달콤한 결실을 얻을 것입니다.”

 

그의 차별적인 무기는 뭘까. “초심과 프로의식, 사람을 향한 신뢰, 이 셋을 유지하는 겁니다.”

 

김현종 기자 tazan@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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