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재일교포와 유대강화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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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재일교포 고향 투자 1호는 제주관광호텔”

<봉쇄정책에서 포용정책으로>
제주도에서 길의 혁명, 물의 혁명을 추진하면서 내가 고민에 빠진 문제는 빈약한 정부예산만으로는 제주도 개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관광인프라를 갖추기 위해선 민간자본의 제주도 투자가 시급한 과제였다.

 

정부로부터 예산지원 요청을 할 때도 제주도민들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워야 효과적으로 예산절충을 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했다.

 

최소한의 관광호텔과 관광시설을 갖추기 위해선 정부예산이 아니라 민간 기업이나 민간 자본가의 투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도지사로 일을 하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이 자신들의 고향 학교와 마을에 개별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한 두 곳의 아니라 제주도 전역의 마을이 재일동포의 지원에 적잖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제주도 인구에 비해 학교가 많았고 많은 학교가 거의 정부에 의지하지 않고 도민의 손에 의해서 지어졌고 그 이면에 재일동포의 힘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주도민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를 설립한 것은 전국적으로 특수한 사례였다. 그래서 나는 제주도와 재일동포와의 관계를 살펴본 결과 일제강점기에 제주출신들이 많이 일본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분이 많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해방이후 일본정부와의 미수교, 4·3사건과 6·25전쟁 등 불안한 정세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거주하는 분들이 많고 그 분들의 고향사랑이 다른 지역과 달리 특별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재일교포에 대한 봉쇄정책에서 포용정책으로 바꿨다.

 

나는 과거정부가 재일동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는 또 제주 출신 재일동포중 조총련계가 많아 이들을 우리 진영으로 되돌아 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포용정책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62년 새해 들어 나는 “앞으로는 국가의 경축행사에는 필히 많은 재일동포가 참석할 수 있도록 초청하고 싶다”고 선언하고 도민 대다수의 공감을 얻었다.

 

나는 1962년도 2대 특수사업으로 재일동포와의 문화교류사업을 제시하고 제주출신 제일동포의 명단을 확보해 조국과 마을 발전을 위해 적극 동참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재일동포와 향토와의 교류는 획기적으로 시작됐고 재일동포가 적극적으로 고향땅을 밟게 됐다.

 

이 때부터 조총련계 출신이더라도 제주고향을 방문한 재일동포는 감시를 받거나 사찰대상에서 해제되는 계기가 됐다.

 

이는 15만 명 이상 되는 재일교포라는 인적자원을 도외시 하고 제주도행정을 수행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고 제주도 개발 사업에 교포자본의 유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나는 혁명정부에 재일교포 개방정책을 요구했는데 이를 검토한 치안국의 담당이 구자춘 정보 과장이었다.

 

구 과장은 나의 주장을 적극 뒷받침하며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도와줬는데 나중에 제15대 제주도지사로 부임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재일교포 모임인 재일제주개발협회를 제주도에 초청했는데 1962년 2월 제주출신 재일교포 6명이 한재룡씨를 단장으로 하는 향토방문단선발대를 조직해 고향의 교통과 전력, 접객시설 투자문제를 논의하기위해 제주도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제주도 개발의 계획을 설명하며 재일교포들의 고향발전을 위한 투자를 건의했다. 그들은 일본에 돌아가서 될 수 있는 한 제주개발에 힘쓰고 고향발전을 위해 애쓰겠다며 정부도 개발소지가 풍부한 제주도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이에 앞서 1961년 3월 20일 재일제주개발협회 고원일 이사장이 향토개발에 필요한 자료수집과 실정조사를 위해 제주도를 찾아와 제주개발협회의 명의로 제주시에 건설기금을 전달했는데 이 기금으로 가설된 것이 관덕정 분수대였다.

<1차 향토방문단 고향방문>
1962년 4월10일에는 김평진 회장을 중심으로 단장인 고원일, 고봉준, 김한두, 고한실, 김창휘, 강위길, 장윤종, 김동규, 김태영, 김귀종, 양명원, 김양준, 강민선, 신용식, 김양웅, 임의준, 최애자 등 18명이 1차 향토방문단이 나의 초청으로 제주도를 찾았다.

 

거의 20년간 단절됐던 재일교포와 고향의 장벽을 허문 향토방문단은 하네다공항에서 노스웨스트 항공기로 서울에 도착한 후 제주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귀성메시지를 발표하며 감격했었다.

 

이들이 제주공항에 도착해 환영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영접시설이 없어서 트럭으로 도청의 의자를 싣고 와서 잔디위에 늘어놓고 환영회를 했다.

 

이때 제주도의 기술연수생 일본초청과 오현고 축구팀의 일본초청이 화제가 됐었는데 오현고 축구팀은 이해 9월 일본을 방문해 일본 고교축구팀과 경기를 치렀다.

 

나는 고향방문단을 도청으로 안내해 제주개발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제주도가 자체 제작한 ‘제주도’라는 홍보영화를 상영했다.

 

이들은 450만환의 개발기금과 감귤묘목 500본, 현미경과 의료기구등을 제주도청에 기증했다. 이때 기증받은 감귤묘목은 서귀농업고와 제주대학 농학부 농장에 심기도 했다.

 

고향방문단은 제주도에 있으면서 여러 관공서를 방문하고 산업시설을 둘러봤으며 친지들을 만났는데 도민들은 거리에서 만난 이들에게 열렬한 환영의 인사를 했다.

 

이같은 고향 도민들의 따뜻한 환대와 개발에 대한 도민들의 열정은 고향을 방문한 재일동포들로 하여금 고향 제주도에 대한 사랑을 더욱 높일 수 있게 했다고 본다. 실제로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은 그곳에 있는 재일동포들에게 고향 사정을 전하며 제주도 지원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의 안내로 한라산 횡단도로 공사현장을 방문한데 이어 경찰국 법원 제주대학 제주시청을 방문했다.

 

나는 이들이 15일간의 고향 방문 후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서울로 안내해 중앙청에 있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직접 제주도 개발에 대한 혁명정부의 지원의지와 관심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박 의장은 “정부는 제주도의 관광, 축산, 특수작물, 민속 등 5대 자원개발에 노력하겠다 교포들도 향토를 위해 관광시설 등에 투자의욕을 조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 의장은 또 “제주도에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고 싶어도 그들을 맞이할 만한 호텔시설이 부족하지. 교포들 중에 뜻있는 분이면 투자해보라”고 권유했다. 나도 “중앙에서 손님이 내려올 때도 그렇고 외국인 관광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현대식 시설을 갖춘 호텔이 필요하다”고 거들었다.

 

그러자 김평진 회장이 즉석에서 “제가 제주도에 현대식 호텔을 짓도록 하겠다”고 제의해 다음해 제주도에 처음으로 관광호텔이 지어졌다. 물론 제주출신 재일교포의 제주투자 1호가 바로 제주관광호텔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오현고 축구팀에 대한 일본초청을 교포들이 수락함으로써 그해 8월 3일 일본축구협회의 정식초청장이 도착해 9월 15일부터 28일까지 일본을 방문해 공식·비공식 5번의 게임을 해 4승1패를 했다.

 

이해 10월6일에는 대한결핵협회대한특별지부가 의사들로 구성된 제주도결핵환자위문단(단장 강시홍) 16명이 제주도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재일동포에 대한 포용정책을 꾸준히 펼친 결과 1961년 한 해 동안 제주고향을 방문한 재일동포의 수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1962년에는 542명으로 급증하는 등 재일동포와 제주도간의 유대는 점차 회복되어갔다.
정리=강영진 기자 yjka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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