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은 끝나지 않는 항거의 몸짓이다
주일날 교회 대신 문득 찾은 친정바다
여태껏 갈매기 몇 마리 저 이랑을 겨누고 있다

 

내 고향은 큰딸에게 돌염전 대물린다
밭 대신 20여 평 유산으로 받아든
어머니 구릿빛 내력, 자리젓보다 더 짜다

 

돌소금 한 됫박이면 겉보리도 자리돔도 한 되
소금구덕 하나로 산간 마을 돌아오면
등짝에 서늘히 젖은 술주정도 묻어난다

 

엄쟁이에선 더 이상 천일염 못 만든다
4.3으로 6.25로 다 떠나보낸 구엄마을
무얼 더 고백하라고 싸락눈 또 오시는가

 

             -문순자의 ‘돌염전’ 전문

 

   
▲ 일곱 번째 바람난장이 애월읍 구엄리 돌염전에서 진행됐다. 사진은 돌염전의 모습.

‘바람 난장’은 회를 거듭할수록 안팎의 관심이 높아지고 신명도 더해가고 있다.


2017년 2월 11일 오전 11시. 구엄포구를 낀 돌염전에는 궂은 날씨 탓에 난장팀의 일부 대원들마저 불참할 수밖에 없었지만, 구엄리 어촌계장 김찬수씨(53)와 조두헌씨(82)를 비롯한 마을주민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시 낭송가이자, 수필가 윤행순씨가 이 작품을 낭송하는 동안, 하얀 소금 대신에 연신 싸락눈이 휘몰아친다. 집채만 한 파도와 갯바위가 용호상박 하듯 서로 으르렁거리고 수십 대의 관광 차량도 떼 지어 오락가락한다.


선남선녀들은 흩날리는 물보라에도 아랑곳없이 이승의 한 때 구엄의 겨울풍경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여기저기 셀카봉을 들이민다.

   
▲ 구엄 돌염전의 마지막 엄쟁이 조두헌씨(사진 왼쪽)와 김찬수 구엄리 어촌계장.

이 작품을 쓴 문순자 시인은 엄쟁이로서의 DNA를 갖고 있다. 바로 이 돌염전 곁에서 나고 자라 어머니나 주변 사람들에게 듣고 보고 느낀 그대로를 시화한 것이다. ‘돌염전’을 통해 선대들이 어떻게 시대와 역사를 통과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백서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구덕에 소금이나 자리를 지고 장전, 소길, 납읍, 용흥리 등의 중산간 마을을 다니며 조 보리 콩 등 농산물과 물물교환을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땀과 눈물이 밴 구릿빛 가족사가 만져진다.


조두헌씨는 구엄 돌염전의 마지막 엄쟁이다.


그는 “돌염전은 조선 명종 14년(1559년)부터 시작되었고, 1950년 6.25를 겪으면서 육지부의 소금이 들어와 400년의 소금빌레 역사가 소멸되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또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구엄리에는 집이 100가구 가까이 됐었고, 해수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해 생업수단으로 한 집 당 60kg짜리 소금 두 가마니 정도씩을 생산해냈다” 면서 “한번 소금을 생산하려면 빠르면 보름, 늦으면 20일 정도 발이 부르틀 만큼 힘들게 일했다”고 회고했다. 누가 뭐래도 ‘소금빌레’는 마을의 큰 보물이라는 조씨는 2009년에 약 100평방미터를 복원했다면서 하루속히 이 돌염전이 문화재로 지정되고, 전수생들이 생겨나서 대를 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 유창훈 作 ‘구엄 돌염전과 생이바위’.

김찬수 어촌계장은 “청정제주바다, 세계 유일의 돌염전에서 생산된 천일염은 알갱이가 굵고 짠맛이 덜하며 감칠맛이 도는 특징으로 인해 이곳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면서 “어촌체험 이외에도 이를 상품화하기 위한 품질검사를 마쳤고, 2012년 염전개발허가증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순자 시인의 ’돌염전‘이란 작품을 시비로 세웠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마을에서 만든 천일염을 직접 맛본 난장팀은 독특한 맛도 맛이지만, 왕소금 같은 역사를 헤쳐 온 구엄마을 주민들의 눈물 맛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글=오승철 그림=유창훈 시낭송=윤행순

 

※다음 바람난장은 18일 오전 11시,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위치한 머체골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