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 정치 결별…성장의 열매 돌려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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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지사 후보 라이프 스토리…기호 7번 무소속 원희룡
가난했던 유년·20대 노동운동·30대 사시 수석
16대 총선 때 정계 입문, 보수 개혁의 아이콘
2014년 도지사 당선…외부 차입금 해결 성과

궁핍했던 어린 시절=무소속 원희룡 후보(54·기호 7)1964년 서귀포시 중문에 있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원 후보는 어린 시절에 대해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아 밤에는 석유등을 켰고, 쌀밥은 구경조차 힘들어 고구마를 썰어 말린 빼대기로 배를 채웠다고 회고했다. 사과상자를 엎어놓고 책상으로 이용했다.

부모가 리어카에 짐을 싣고 시장으로 가던 날 그는 리어카에 타겠다고 응석을 부리다 바퀴에 발이 끼어 오른쪽 둘째 발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시골에는 병원이 없던 시절, 그는 사설 진료소에서 속칭 야매 봉합 수술을 받았다.

부러진 발가락을 관절 위로 붙이는 바람에 발가락 두 개가 위로 뒤틀리는 질병을 갖게 됐다.

궁핍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학업에 더욱 매진하게 만들었다.

부친은 과자가게, 배추장사, 신발가게, 책방 등을 전전했지만 장사가 안 돼 빚 독촉에 시달리고, 흉기로 위협을 받기도 했다.

공부의 신이 되다=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그래서 줄곧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1982년 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며 서울대 법학과에 수석 입학하면서 원조 공부의 신()’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대학 입학 후 몇 달간 도서관에서 공부에만 열중했다. 장학금을 타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복 경찰들이 교정에 들어와 유인물을 뿌리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끌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 1980518일에 일어난 광주의 진실도 알게 됐다.

19856월 그는 인천에서 프라이팬과 냄비를 생산하는 공장에 출근했다. 대학생 신분을 속이고 말단 노동자로 위장 취업을 했다. 밤마다 구로공단에서 야학활동을 했던 그는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나이 많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의식개혁을 한다는 것이 공허했고, 한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관리자와의 다툼 끝에 공장에서 나왔다.

사법시험 수석 합격=1989년 사회주의 동구권이 몰락했다. 그는 인생을 걸고 노동현장에 투신하게 만든 혁명이론은 부질없었고, 이념적 우상에 불과했다고 자각했다. 석 달간 무전취식으로 전국을 돌며 방황했다. 소록도에 가보니 손과 발이 없는 환자를 보며 이념보다 인간의 삶이 먼저라는 사실을 느꼈다.

그는 방황을 접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서른이 다 돼서 공부를 하자니 쉽지 않았다. 고통의 시간을 어금니로 깨물고 엉덩이로 버텼다.

사법시험 준비 2년만인 1992제주도 출신의 원희룡씨가 제34회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했다는 제목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사법연수원 졸업 후 그는 검사의 길을 택했다. 검사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범죄자들을 다루다보니 사람의 말을 일단 의심해야 했다. 거칠게 살아온 이들을 다루기 위해선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도 필요했다. 이런 일은 그의 체질이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정계에 입문하다=200016대 총선 당시 젊은 피를 수혈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그는 정계에 입문했다. 서울 양천구에서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그는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소장파 모임을 결성하고 당 지도부를 비판해 보수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2003년 남경필·정병국 의원 등과 함께 결성한 미래연대는 이른바 ··’이라 불리며 지금도 소장파의 대표적 모델로 회자되고 있다.

정치 인생에서 늘 승승장구하지는 않았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나경원 의원에게 경선 패배의 쓴잔을 마셨고, 2011년에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당 대표 도전 실패 이후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11년간 소장파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외쳤지만 무엇을 얼마나 바꾸었는가라는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 선택은 국회의원 불출마였습니다.”

낡은 세력을 타파하다=2014년 새누리당은 그를 6·4지방선거의 제주도지사 후보로 호출했다. 결과는 60%의 득표율을 얻은 압승이었다.

도지사에 당선된 그는 오랜 세월 제주의 정치를 쥐락펴락해 온 낡은 세력과 직면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조배죽’(조직을 배신하면 죽음·도정의 건배구호)을 외치며 공무원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 같은 비정상적인 관행이 만연했다고 회고했다.

변화의 시작은 공직 부문이었다. 그는 공무원을 줄 세우지 않겠다는 약속 이후 인사는 공정했고 예산은 짜임새 있었다. 특히 방만한 예산을 개혁해 4000억원이 넘는 외부 차입금을 모두 갚은 것은 큰 성과였다고 강조했다.

“1989년부터 30년 가까이 여러 도지사들이 공약만 하고 풀지 못했던 제주의 숙원사업인 제2공항 유치도 해냈죠. 2만대씩 증가하는 자동차와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30년 동안 큰 변화가 없던 대중교통체계에도 손을 댔습니다.”

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56층으로 설계된 고층 빌딩을 38층으로 줄이고, 중산간 개발과 외국인 투자영주권도 제한했다. 이 때문에 토착 건설업자들과 갈등을 빚고 긴장이 형성됐지만 굽히지 않았고 회상했다.

이제는 밥상을 차릴 시간=원 후보는 정신없이 달려온 4년이었다고 했다. 도민의 부름을 받고 제주에 왔을 때는 난개발과 급속한 인구 및 관광객 증가에 따른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표출됐다.

부동산 개발 위주의 중국자본 유치와 이로 인한 난개발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성장위주 정책이 초래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제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시간이라고 했다.

대중교통체제 개편과 주택난 및 쓰레기 처리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다. 부족했던 부분, 잘못했던 부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고칠 것은 고치겠다고 다짐했다.

원 후보는 지난 4년간 설거지를 했다면 이제는 밥상을 차릴 시간이다. 도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제주의 성장을 도민 모두의 것으로 돌아가게 만들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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