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 속 희생된 혼령의 넋을 달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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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랑쉬굴 (上)

4·3 때 어린아이까지 집단 희생
역사적 아픔과 안타까움 느껴
참여자들이 함께 무명천 잡고
이름 호명하며 망자의 넋 달래
실감나는 퍼포먼스 낭독 들으며
가슴 얼얼해지는 전율을 느껴
지난 11일 바람난장이 아끈다랑쉬오름 다랑쉬굴 4·3유적지 부근에서 펼쳐졌다. 고은 作. 다랑쉬굴,
지난 11일 바람난장이 아끈다랑쉬오름 다랑쉬굴 4·3유적지 부근에서 펼쳐졌다. 고은 作. 다랑쉬굴.

다랑쉬오름 기슭이다. 여명이 동트고 있다. 아침 햇살이 비스듬하게 올라와 오름밭을 밝히는 중이다. 하루가 신비스러운 빛으로 열리고 있다. 
다랑쉬오름 진입로는 딴 판이다. 신비감에 싸여있던 원초적인 풍경이 퇴색되고 말았다. ‘오름의 요정’은 그대로인데, 초원의 구불구불한 검은 돌담도 그대로인데, 왜 탄성이 나오지 않을까. 직선으로 넓게 뺀 도로가 볼썽사납고, 안내소 근처에서 큰 아가리를 벌린 공사장도 볼썽사납다. 거기에다 도로 양쪽에는 암석을 깬 울타리와 쇠 울타리가 둘러쳐 있다. 관계기관에서는 세상의 변화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할지 모르나, 예전이 그리운 이들에게는 큰 아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리움이 쉬이 잊히겠는가.

다랑쉬굴 앞에 와 있다. 4·3항쟁으로 죽어간 혼령들이 아직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제주에 태어난 죄로 동족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다. 토벌대가 동굴 입구에 불을 지펴서 질식시켜 죽인 것이다. 굴속에는 어린아이도 있었다고 한다. 

강섭근 연주가가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다.
강섭근 연주가가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다.

동백꽃 스무여 송이가 주위에 흩어져 있다. 애기동백을 껴안은 엄마동백 꽃잎이 유난히 검붉어 가슴 짠하다. 저쪽 빌레엔 빛바랜 고무신 한 짝이 나뒹군다. 애처롭다. 강섭근님의 ‘이별 노래’가 색소폰을 타고 흐른다. 가슴이 아리다. 음악가는 악기로 시(詩)를 쓰고 노래하는가.

‘질트기’ 차례다. 현장에 있던 서른 남짓 사람들이 기다란 무명천을 잡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승을 떠나는 발걸음이 무거운지 굴 주위에 다가갈수록 더디다. 

그러자 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함이었는지 김정희님이 나섰다. 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이 일렁이고 있다. 하얀 무명천도 일렁이고 안개까지 울먹울먹 피어오른다. 

‘애기동백꽃의 노래’ 가 구슬프게 깔리고 있다. 
산에 산에 하얗게 눈이 내리면/ 들판에 붉게 붉게 꽃이 핀다네 
우리 누이 같은 꽃 애기동백꽃/ 봄이 오면 푸르게 태어나거라 
한 핏줄 한겨레 싸우지 마라…

노랫가락을 타고 홀연히 나타난 다섯 선녀. 여느 때와 달리 옅은 화장이라 청초하다. 검은 드레스에 하얀 날개옷, 그리고 손에는 나풀거리는 하얀 천을 들고 있다. 맨발로 땅을 살포시 내디디며 경건한 의식을 치른다. 마치 신의 경지에 이른 듯, 범상치 않다. 예술이란 육체와 영혼 사이를 넘나드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인가. 

바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우중충하다. 저만치 다랑쉬오름으로 피어오르는 안개. 

시낭송가 김정희님이 가만히 혼백을 위무한다. 

누가 이곳에 불씨 묻어 놓았을까
겨울비 트럭에 싣던 다랑쉬 오름 중턱 
한줄기 연기를 따라 
휘적휘적 오르는 바람

아니야, 저건 필시 산사람 행적일 거야 
한밤중 영문 모른 채 동굴로 숨어들었던 
다랑쉬 4·3의 잔해, 저들의 혼백일 거야

-문순자, ‘파랑주의보6’ 일부


어쩌면 이렇듯 절절하게 와 닿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연민과 공포의 감정은 일종의 고통이지만, 예술작품을 통해 감정이 분출되고 배설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되어 영혼이 치유될 수 있다고요.

작년에 세웠다는 표지석에 이런 글이 쓰여 있더군요.

 여기에 인간이 있었다. 삶이 있었다/ 우리는 죽은 자들,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우리는 캄캄한 굴속 연기에 갇혀 연기로 떠도는 자들/ 사라지지 않는 자들이다// (중략)
겨우 수습하고 고개를 드니 강상훈님과 정민자님이 돌무더기에 앉아있다. 
이생진 시집에 있는 ‘다랑쉬오름의 비가’ 중 일부를 낭송한다.
아이: 이젠 총성이 멈췄으면 좋겠어.
노시인: 우린 전쟁으로 망했지. 얘야, 아홉 살에 변을 당했으니 네가 살았다면 몇 살이지?
아이: 예순셋?
노시인: 그럼 44년(1948-1992) 동안을 망각의 굴속에 있었단 말인가. 빌어먹을! 
아이: 총성, 또 총성이야.
노시인: 아니 너는 아직도 총성에 시달리고 있니? 얘, 얘, 놀라지 마. 그건 가짜야! 그 사람들 다 갔어.
아이: 비가 와, 비가….
노시인: 그래, 우울한 비석에 궂은비가 내리네. 계속해서 말해봐 비석아, 아파할까 봐 다 새겨 넣지 못한 말까지 말해봐.

시를 낭독하는 강상훈, 정민자.
시를 낭독하는 강상훈, 정민자.

부부가 노인과 아이로 빙의해 얼마나 닮암직ᄒᆞ게 열연하던지 소름이 쫙 돋았다. 가슴이 얼얼하다. 역시 베테랑 연극인답다. 
3월 24일부터 대한민국연극제가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열리는데 마침 ‘만리향’(강상훈 연출)도 무대에 오른다. 
그때도 우리 내면의 감정을 끌어내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벌써 설렌다. 

▲사회=이정아 
▲무용=박연술 연무용단(박연술,정옥남,고성미,박영신,한은경)
▲낭송=김정희, 이혜정, 장순자
▲퍼포먼스 낭독=강상훈, 정민자
▲노래=이마리아
▲음악=서란영, 강섭근
▲그림=고은
▲글=고연숙
▲사진=허영숙
▲영상=고성민
▲음향=장병일
▲총감독=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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