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기별을 기다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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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겨울이 돼도 푸르른 송백처럼 (上)

위리안치에 처한 추사 선생의 삶을 떠올리며 난장 펼쳐져
고립감 속 자유 갈망하는 유배인의 마음을 표현해보기도
지난 24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적거지에서 바람난장이 열린 가운데 참여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지난 24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적거지에서 바람난장이 열린 가운데 참여자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올해 예술이 흐르는 길 열한 번째 바람난장은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서 펼쳐졌다.
필자가 사는 구좌읍 하도리에서 한 시간 반가량을 달려와 다다른 곳은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 선생의 유배지다. 높은 돌담 아래 가지런히 자라난 봉숭아가 때 묻지 않은 소녀의 모습으로 반긴다. 봉숭아 아래에선 수선화 구근이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추사 선생이 육지로부터의 기별을 기다리듯.

어느 쌀쌀한 날에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겨울과 이른 봄 사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수선화는 진한 향기를 품은 채 피어 있었다. 옛 선비들이 귀하게 여겨서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수선화, 제주도에서는 농부들이 귀찮게 여기며 뽑아 버릴 정도로 자갈밭마다 하얗게 피어 있다는 추사 선생의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수선화를 좋아했고, 이곳에서 추사체를 완성했다는 선생의 이야기를 더듬다가 추사적거지로 발길이 닿았을 때 탱자나무 울타리에 눈길이 가 닿는다. ‘위리안치’ 선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배인으로 갇혀 살아야 했던 고단함이 날카롭게 가시를 내밀고 있는 탱자나무에 새겨져 있는 듯하다.

연무용단의 무용 공연.
연무용단의 무용 공연.

김정희 바람난장 대표의 인사가 있고 나서, 연무용단 대표 박연술의 춤으로 무대가 열린다. ‘이화우 흩뿌릴제’ 음악이 흘러나오고 무용가는 추사가 돼 한 발 두 발 내디딘다. 등을 높이 올려 님을 향한 마음을 전해본다. 머나먼 곳에 유배된 당신의 마음을 높으신 님께서 알아주시길, 다시 불러 돌아갈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은 춤사위가 곱게 넘실거린다.

때마침 ‘주한 외교관과 함께하는 2023 서귀포 문화재 야행’에 참석한 외국인들이 고택을 둘러보다가 바람난장 관람객으로 가담한다. 좁은 마당에 무대가 열리고 난간(툇마루)에 앉거나 마당을 빙 둘러선 남녀노소 외국인 관광객들, 호기심 어린 눈이 반짝인다.
사회자 이정아의 안내에 따라 서란영의 팬플루트 연주로 ‘엘콘도르파사’가 마음에 흥을 넣으며 부드럽게 이어진다. 팬플루트 연주 중간에 악기는 잠깐 바뀐다. 새소리를 닮은 오카리나다. 새가 돼 자유롭게 멀리 날아가고 싶은 유배인의 마음을 더 잘 표현하고 싶었을까.

고정매 문화해설사(사진 왼쪽)의 설명 모습.
고정매 문화해설사(사진 왼쪽)의 설명 모습.

고정매 문화해설사가 추사의 유배지 생활에 대한 설명을 하고 틈을 내어 외교관 가족들을 위해 그들과 동행한 통역사의 통역이 뒤따른다. 추사가 살았던 집의 주인은 강도순이다. 당시로서는 잘 사는 집이었다. 인품과 학식이 높은 추사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했다는 설명이다.

이어서 이근배 시인의 ‘세한도’를 이정아, 장순자가 낭송한다. 한 줄 두 줄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온다.

1
바람이 세다
산방산山房山 너머로 바다가
물을 틀며 기어오르고 있다
볕살이 잦아지는 들녘에
유채 물감으로 번지는
해묵은 슬픔
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 
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
가시울타리의 세월이 
저만치서 쓰러진다
바다가 불을 켠다.

2
노인이 눈을 뜬다
낙뢰落雷처럼 타버린 몸
한 자루의 붓이 되어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
이 갈필渴筆의 울음을 
큰 선비의 높은 꾸짖음을 
신인들 어찌 가둘 수 있으랴
신의 손길이 와 닿은 듯
나무들이 일어서고
대정大靜 앞바다의 물살로도
다 받아낼 수 없는
귀를 밝히는 소리가
빛으로 끓어넘친다
노인의 눈빛이 
새잎으로 돋는다

-이근배 ‘세한도歲寒圖-벼루 읽기’ 전문

추사 김정희 역의 강상훈.
추사 김정희 역의 강상훈.

시인은 추사 김정희의 시대를 상상하며 추사의 심정으로 시를 쓴다. ‘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가시울타리의 세월이/저만치서 쓰러진다’ 깜깜한 절망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두 번째 연에서 노인은 눈을 뜬다. ‘한 자루의 붓이 되어/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이 갈필渴筆의 울음을/큰 선비의 높은 꾸짖음을/신인들 어찌 가둘 수 있으랴’ 신도 어찌할 수 없는 송백같이 푸르고 꼿꼿한 기개로 다시 눈을 뜬다.

세한도는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절해고도 제주에 갇힌 유배인, 많던 벗들은 소식이 점차 멀어지더니 인연마저 끊어간다. 부인 이 씨도 세상을 떠나버려 슬픔과 고립감은 나락으로 떨어진 것 만큼 심했을 것이다. 그런 때에 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청나라에서 지필묵과 귀한 책들을 구해다가 전해 줬다.

힘없는 몸이 돼 모두가 등을 돌릴 때,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기란 쉽지 않다. 겨울이 돼도 푸르른 송백처럼, 변함없는 제자 이상적의 ‘의리’에 감동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글=좌여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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