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는 풍경 아니어도 사라봉은 충분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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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시를 품은 사라봉(上)

맛깔스럽게 빚어낸 제주어 시 낭송, 바람이 노래하고 숲이 연주
박수와 사진, 공연을 쫓는 아이들...관객과 예술이 하나가 되는 정경

일몰을 배경으로 난장을 펼쳐야 하는 건 아닐까. 사라봉 저녁노을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해지는 풍경이 아니어도 사라봉공원에서 본 바다가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사라봉 등대에서의 바다 전망이 그렇다. 제주항 부근 공사로 등대에서 바라본 조망이 전에 봤던 감동은 아니었지만, 하늘과 맞닿은 쪽빛 바다는 여전했다. 햇빛 가루가 바다 위 윤슬로 내려앉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주며 다가온다.

예술의 흐르는 길 ‘바람난장’이 사라봉공원에서 펼쳐진다. 사라봉에서 시를 낭송하고, 바람이 노래하고, 숲이 연주한다. 잠시 가던 길 멈추고 함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김정희 대표가 들머리 짓는다. 언젠가 스카프를 랩스커트로 코디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두 장을 액세서리 핀으로 꽂아 원피스 위에 툭 걸쳐 멋 내기를 했다. 주변 분위기와 어울리니 공연을 한껏 끌어 올려 줄 듯하다. 

김순란 시인의 제주어 시 ‘비는 누게 거라’를 낭송하며 바람난장을 연다. “비 오는 날 끔끔한 생이소리/ 아칙 땟거리 촞앙/ 낭가젱이 우티로/ 태역밧 알로/ 주왁거리단 소리 몬 어디 가신고” 낭송을 듣고 나니 궁금해진다. 

새소리로 여는 아침은 늘 상쾌했다. 비 오는 날 그 많은 참새는 다 어디로 가는지. 맛깔스럽게 제주어 시로 빚어내는 낭송이 비 오는 날 뜸한 새소리를 불러들인다. ‘호꼴락혼, 초고롱, 주왁거리단.’ 제주어가 낭송가의 입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혜정님의 사회로 공연이 이어진다. 사라봉에 왔으면 ‘사봉낙조’는 예의인 게다. 첫 순서로 이청리 시인의 사봉낙조를 시 낭송가 이정아님이 낭송한다. 누가 바다에 붉은 와인을 빠뜨렸을까. 와인빛 노을이 연상되는 낭송이다. “저녁 노을이 꽃바다인가/ 꽃 바다가 저녁 노을인가//… 행복의 불이 켜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라” 아직껏 누군가에게 꽃이 되어 피지 못했다면 나는 오늘 꽃바다에서 꽃을 활짝 피우겠다. 그리고 행복의 불의 켜진 집으로 돌아가겠다. 와인빛 노을이 그림으로 그려지듯 사봉낙조에 푹 빠져 있다.

사봉낙조

저녁 노을이 꽃바다인가
꽃 바다가 저녁 노을인가

저 속으로 뛰어 들어
타오르고 싶어라

단 한 순간만이라도
하늘로 돌아가서
이 세상에서
살아왔던 날들을 보고 싶어라

우리가 누군가에게
꽃이 되어 피지 못했다면
활짝 피고 싶어라

모두에게 손 내밀어
착한 이웃이 되어
저녁 노을을 무등타고
돌아가고 싶어라

사라봉
그대 낙타 등을 타고
돌아가고 싶어라
행복의 불이 켜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라

-이청리 시인의 ‘사봉낙조’ 전문

 

팬플루트 연주가 서란영님이 ‘산과 계곡을 넘어서’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연주한다. 산과 계곡을 넘어서를 연주할 때는 사라봉의 사계절을 촬영한 영상을 보는 듯하다. 사라사(紗羅寺) 대웅전 처마와 지붕에 켜켜이 쌓인 눈, 벚꽃이 만개한 사라봉 정상, 생의 정점에서 진초록 융단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 한낮의 뜨거운 열기와 달리 싸늘한 밤의 기온 차에 서두른 가을 단풍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악기 연주가들에게는 감성의 선율로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이 있다.

시 낭송가 장순자 님이 공광규 시인의 ‘숲과 바람’을 낭송한다. “숲은 우주를 장서한 도서관/ 바람은 쉼 없이 책장을 뒤적이는 독서광” 바람은 대단한 모범생인 듯하다. 매일 매일 숲을 누비며 우주를 읽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어느 정도의 책장을 넘겼을까. 바람이 들려줄 숲의 얘기가 궁금해진다. 낭송 중간 까마귀 한 마리가 “깍 깍” 소리를 낸다. 이 까마귀 또한 소소한 거 하나 놓치지 않는 바람처럼 숲을 뒤적일 것이다. 

공연의 중간쯤이다. 산책로를 걸으며 박수로 화답하는 방문객, 행사에 관심을 보이며 다음 일정을 물어보는 방문객, 사진 촬영을 위해 손으로는 브이를 그려 보이지만, 눈은 이미 바람난장 공연을 좇고 있는 아이들. 관객과 예술이 하나가 되는 정경이다. 바람난장에 취하고 숲의 싱그러움에 취해 사라봉공원에서는 길을 잃어도 괜찮다. 조금 돌아가면 그만이다. 오히려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예술이 흐르는 길 바람난장도 흐르고 있다.   
                                                            
글=고여생

▲사회=이혜정 ▲시낭송=이정아·장순자·김정희 ▲연주=서란영·성동경 ▲노래=이마리아 ▲그림=고은 ▲사진=홍예 ▲영상=김종석 ▲음향=장병일 ▲총감독=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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