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야행 물드린 바람난장에 할락산이 웃엄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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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귀포 문화재 야행의 피날레를 장식하다 (上)

2023 서귀포 문화재 야행 마지막 공연 화려하게 장식
늦은 밤에도 멈추지 않고 시와 음악이 흐르고
어화둥둥 펼쳐진 춤사위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
2023 서귀포 문화재 야행에서 펼쳐진 바람난장 이후 단체사진.
2023 서귀포 문화재 야행에서 펼쳐진 바람난장 이후 단체사진.

예정보다 이른 시각에 도착했다. ‘2023 서귀포 문화재 야행’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비어 있는 곳을 찾아 앞쪽에 앉았는데 한눈에 공연이 쏙 들어온다. 그 덕일까. 다른 곳으로 눈 돌릴 틈 없이 무대 구성원이 되어 함께 공연하는 기분이다.

추사 김정희의 삶을 다룬 연극에서는 차를 사랑했던 추사와 초의 선사의 정겨운 대화가 이어진다. 추사가 제주에서 팔 년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초의가 다섯 번을 다녀갔다고 하니, 그 우정을 말해 무엇하리.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바람난장 식구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제주 곳곳을 누비는 공연에 이력 났을 법도 한데, 무대 위에 오르기 전엔 늘 긴장하는 모습이다. 의상을 한 번 더 매만지며, 서로의 거울이 되어 챙기는 게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표정이다.

김정희 바람난장 대표가 공연의 시작을 알리며, 나희덕의 시 ‘섶섬이 보이는 방’을 낭송한다. 섶섬이 보이는 이중섭 화가의 방에서 그를 추모하며 ‘한 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불행하게 살았던 화가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시라고 한다.

김정희와 시놀이.
김정희와 시놀이.

나희덕의 시 ‘섶섬이 보이는 방’

-생략-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 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서귀포 야행과 야경, 그리고 바다 어디쯤에서 이중섭의 궁핍한 삶을 지켜보던 섭섬의 형상이 눈앞을 스친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밤공기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조명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가 연상되는 밤이다. 고흐도 아를 광장의 카페 풍경을 그리며,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늦은 저녁을 따뜻하게 위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빨간 의상에 하얀 목걸이로 멋을 낸 팬플루트 연주가 서란영 님이 무대에 오른다. 관록일까. 단숨에 자신의 끼로 무대를 장악하며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연주한다. 쇠고랑을 찬 노예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희망을 담은 곡이어서인가. 비애감과 강한 전의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김정희와 시놀이팀이 나기철 님의 시 ‘서귀포에는 내가’를 낭송할 때는 짓궂게도 서귀포에 있는 ‘달맞이꽃 여인’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정아 시낭송가가 낭송한 이애현 님의 시 ‘엉또폭포 앞에서’는 ‘살면서 알게 된 물빛’에 내 속을 첨벙, 담그고 싶게 한다.

이마리아와 변창세의 혼성 듀엣.
이마리아와 변창세의 혼성 듀엣.

이마리아와 변창세 님의 혼성듀엣 무대가 이어졌다. 하모니를 이루며 ‘영원한 사랑’을 열창하는 시니어의 파트너십이 돋보인다. 변창세 님의 솔로곡 ‘시간에 기대어’는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후빈다. 지난날 외로움과 그리움에 대한 회한을 지금, 이곳에 다 쏟아붓고 있는 걸까. 고뇌에 찬 숱한 시간에 대한 존중으로 필부(匹夫)의 삶을 완곡하게 승화시킨다.

늦은 밤에도 멈추지 않고 시와 음악은 흐르고 있다. 춤이 빠질 수 없다는 듯 ‘박연술 제주무용단’이 공연을 시작한다. 버선발을 한 네댓의 무용수가 소고를 들고 훨훨 무대를 누빈다. 고정국 님이 쓰고 박순동 님이 작곡한 ‘멀찌거니 할락산은’에 어울리는 어화둥둥 춤사위를 펼친다.

박연술과 제주연무용단 공연.
박연술과 제주연무용단 공연.

‘산더레만 바레보멍 흘강거리멍 살단 보난/ 세월은 샛질행 와그네 어웍덜만 피우국.’ ‘높은 곳만 바라보며 헐떡헐떡 살다 보니 세월은 또 어느새 억새꽃만 피웠구나.’ 삶과 대비되는 자연의 무상함을 표현한 제주어 시다. 가볍지 않은 주제였는데 연출 덕인지 옛사람들의 애환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사회자는 ‘하늘에서 어떤 선녀가 내려왔는고’, 하며 추임새 놓더니 관객을 향해 수작을 부린다.

“할락산은 우릴 보멍 어떵햄시고양?” “웃엄실테주마씸.”

그렇다. 서귀포의 야행을 흥건하게 물들인 바람난장을 보며 한라산은 이 밤, 흐뭇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글=오민숙(세화중 교감·수필가)

▲사회=김정희 ▲시낭송=이혜정·장순자·김정희ㆍ이정아 ▲노래=성악가 이마리아·변창세·랩퍼 우싸이드 ▲색소폰=성동경 ▲팬플루트=서란영 ▲춤 =박연술과 제주연무용단 ▲사진=홍예 ▲영상=김종석 ▲음향감독=장병일 ▲총감독=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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