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하늘 아래서 자유인, 보헤미안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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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귀포 문화재 야행의
피날레를 장식하다 (下)

웃음꽃 활짝, 서늘한 메아리
제주인·이주민·관광객 함께해

여름밤, 심연의 에너지 올려서
차분히 흐르는 색소폰 멜로디

관객들과 함께하는 시낭송과
심장 뛰는 랩으로 열기 더해…

장순자 님이 <산방산> 낭송으로 바람난장을 연다. 양창식 님의 시다. 산방산은 한라산 남쪽에 우뚝 솟은 산으로 중턱에는 산방굴사가 있다. 고승 ‘혜일’이 수행했다고도 하며, 추사 김정희가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하다. 산방굴사의 약수는 산방산의 여신 ‘산방덕’이 못다 이룬 사랑을 아쉬워하며 흘리는 슬픈 눈물이라고 한다. 이런 연유로 시인은 산방산에 올라 산방덕의 사연을 품은 시를 쓴 게 아닐까.

서귀포는 예인(藝人)의 고장인 것 같다. 출연자마다 독특한 의상으로 관객의 시선을 강탈한다. 빨간 셔츠, 찢어진 청바지에 황금색 색소폰을 든 중년 남성이 등장한다. 어둠이 짙게 내린 늦은 저녁 시간인데도 중절모에 선글라스를 착용하여 유랑자의 분위기를 한껏 연출한다. 보헤미안 못지않은 자유분방한 끼로 연주할 태세다. 비슷한 성향의 예술인이 모여 방랑자 같은 무대를 펼치고 있는 ‘바람난장’이니 그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터다. 관습의 허울을 훌훌 벗어던지고 오륙십 대의 낭만을 무기로 여름밤의 감성을 물들이기에 충분하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연주는 가라앉은 심연의 에너지를 찬찬히 끌어 올린다. 들떠 있던 공연장의 분위기가 차분해진다. 연주에 지나치게 몰두했던 것일까. 무대 위에 올라간 김에 90도는 아니더라도 허리를 확 뒤로 젖히고, 몸을 비틀어대며 연주했으면 어땠을까. 관객의 입맛에 맞는 퍼포먼스를 양념처럼 살짝 가미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9월 바람난장이 서귀포 문화재 야행에서 관객과 함께 하는 시낭송.
9월 바람난장이 서귀포 문화재 야행에서 관객과 함께 하는 시낭송.

‘관객과 함께하는 시낭송’ 시간이다. 고(故) 오승철 님의 시 <서귀포 동문로타리 닭내장탕>을 무대 위로 올린다.

고(故) 오승철의 시 
‘서귀포 동문로타리 닭내장탕’

어느 도시에도 찾기 힘든 닭내장탕집
무김치 너덧 개면 접시가 넘치지만
그 식당 아줌마 볼도 김치처럼 물이 든다

닭장에 갇히거나 아파트에 갇히거나
닭의 길, 사람의 길, 그게 그걸 테지만
아리랑 아리랑 같은 구불구불 닭내장길

무김치와 닭내장탕, 아줌마와 사십 년 간판
궁합도 저리 맞아야 세상맛을 아는 걸까
주문을 넣기도 전에 보글대는 저 냄비

서귀포에서 태어난 제주 토박이로 서귀포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시인이다. 흔하디 흔한 일상을 담은 시에 시인의 정서가 듬뿍 묻어난다. 사십 년 ‘닭내장탕’ 간판을 내건 주인장의 속내를 알았던 걸까. 아리랑, 아리랑 같은 구불구불한 닭내장길보다 굴곡이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도 사람과 궁합이 맞아야 한다는데, 오래도록 계속해온 걸 보면 그리 나쁜 궁합은 아니라는 걸, 시인은 알았던 게다. 사람은 가고 없을지라도 ‘주문도 넣기 전에 저 혼자 보글대는 닭내장탕’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걸, 모르지 않았던 게다.

바람난장의 마지막 순서는 항상 시 낭송이었는데 오늘만은 예외다. 17년 경력의 래퍼 ‘우싸이드’가 큰 키에 건장한 몸집으로 시선을 압도하며 걸어 나온다. 관객석에서 환호가 터진다. 나도 흥을 주체하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뿐만이 아니다. 사회자를 비롯하여 관객 모두 일어섰다.

래퍼 우싸이드의 공연.
래퍼 우싸이드의 공연.

어쩐다지, 어지럼증이 있어 공짜 리듬도 한 번 타본 적 없는데. 아니다. 흥을 나누는 건 배우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Wake Up, 한 번 더 소리 질러, 손뼉 쳐, Wake Up. 예정에 없었던 샤우팅이다. 빚쟁이처럼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던 색바랜 관성 따위를 탈탈 털어버릴 수 있는 배짱이 생겼다.

내일은 없다. 지금, 여기에서 나를 온전히 느껴보자. 따뜻한 가슴과 손으로 한자 한자 써 내려가는 게 글이라면, 랩은 뜨거운 가슴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예술인가 보다. 그렇더라도 마음을 달구는 랩의 속도가 점령군처럼 이리 빠를 줄이야. 우싸이드가 지핀 뜨거운 열기가 밤공기를 가르며 수직으로 하늘을 비상한다.

모든 행사의 마무리는 역시 한 컷 사진이다. 운 좋게 우싸이드 옆자리를 차지했다. 포즈를 취하는 틈을 타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오륙 년 전 서귀포로 이주하여 후배들을 가르친단다. 곧 컴백을 준비하는 눈치다.

서귀포 문화재 야행은 제주인뿐만 아니라 이주민, 관광객이 함께하는 융숭한 행사였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 시간, 웃음꽃 활짝 피우는 바람난장의 피날레가 여름 밤하늘에 서늘한 메아리를 남긴다.

글=오민숙(세화중 교감·수필가) 

▲사회=김정희 ▲시낭송=이혜정·장순자·김정희ㆍ이정아 ▲노래=성악가 이마리아·변창세·랩퍼 우싸이드 ▲색소폰=성동경 ▲팬플루트=서란영 ▲춤 =박연술과 제주연무용단 ▲사진=홍예 ▲영상=김종석 ▲음향감독=장병일 ▲총감독=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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