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능선 위에서 사랑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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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가을의 전설, 억새와 바람 (下)

용눈이 오름 위 바람에 실려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시와 노래

억새 물결은 순정 노을빛 따라 안단테로 흘러 우리에게 오고…
홍진숙 作 용눈이 오름의 가을. 캔버스에 아크릴을 칠해 만든 작품이다.
홍진숙 作 용눈이 오름의 가을. 캔버스에 아크릴을 칠해 만든 작품이다.

새벽녘 갈대숲은 잠자는 미녀처럼 평화로웠다 
누가 그 고요를 흔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은 두레박 하나가 
하늘에서 가만가만 내려왔다
(중략)

장순자 시 낭송가가 시를 낭송하는 모습.
장순자 시 낭송가가 시를 낭송하는 모습.

장순자의 시 낭송으로 낭만 시인인 권재효의 시 <갈대숲>이 읊어진다. 시인은 죽어서 아름다운 시를 남기고, 한 편의 시로 우리는 다시 그를 추억한다. 그저 작은 울림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갈대숲의 부르르 떨림은 멈출 수가 없어 오늘도 떨고 있다. 방목하는 말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한가로이 늦가을의 볕을 즐기며 풀 뜯기에 집중이다. 영주 십 경의 제1경, 고수목마가 따로 없다. 

넋 놓으며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 <축배의 노래>가 바람에 실려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테너 김익수와 소프라노 이마리아의 아름다운 이중창 하모니다. 산자락에서 펼치는 공연인데도 두 성악가는 무대 예복을 정성껏 갖춰 입고 나왔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환상의 무대다. 

<축배의 노래>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제1막에 나오는, 사랑을 고백하는 유명한 아리아다. 물결치는 은빛 억새 사이로 애틋했던 알프레도와 비올레타의 사랑이 산자락을 휘감아 메아리친다. 분화구의 용도 들었으려나. 애달픈 사랑에 풀잎도 탐방객도 한 떨기의 바람도 잠시 쉬어 가게 한다. 오늘은 두 손 잡고 오름을 오르는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축배의 잔을 높이 치켜 보낸다. 사랑은 삶의 즐거움! 축배의 잔을 들어라, 사랑의 술을 마시자.

오름과 오름 사이를 배경으로 억새 앞에 오롯이 서 본다. 자연 앞에서 마음은 한없이 작아지고 순박해진다. 한 줄로 서서 쉼 없이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도 아스라하고 360도 뻥 뚫리는 파노라마 시야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부드러운 능선을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느슨해졌다. 모든 시름을 잊게 했다. 매일 같이 눈뜨면 출근하고, 해야 할 일들을 기계처럼 머릿속에 떠올리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혹사했던 몸과 마음, 사람들과 얽힌 그 모든 일이 풍광 앞에서 이상하게도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말 평화로웠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게, 아마 이럴 때 쓰는 단어인가 보다. 그저 이곳에 서 있다는 이 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은빛 억새꽃으로 덮인 용눈이의 능선들만이 하얗게 시려온다.

이창선 시인이 자작시를 낭송하는 모습.
이창선 시인이 자작시를 낭송하는 모습.

멀리 모슬포에서 한걸음에 바람난장을 찾아온 이창선 시인이 본인 자작시 <물이면 물, 오름이면 오름처럼>을 낭송한다. 

원추형 화산체가 깔때기 역할이듯 
정완영 시 낭송에 시심이 고여 든다 
정이월 용눈이 오름에 향유꽃이 피어난다 
부녀가 함께 오른 그날의 생생한 기억 
30에 올랐던 오름, 90에 다시 오른다며 
선생은 백수 구천에도 시 노래 지으신다
(중략)

60이 넘어 90세에 딸과 함께 오르니 제주 곳곳은 가는 곳마다 시 작품이라며 회고하는 고 정완영 시인과 용눈이를 오르며 노래한 정완영 탄생 100주년 공모 당선작이다. 정완영 시인은 서귀포 칠십리 시 공원의 시비 <바람>의 작가다. 그의 바람은 어디서 왔던가. 서귀포 귤밭에서 술래 잡던 밝은 바람이 오늘은 모슬포를 돌아 퍼런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한라산 아흔아홉골 물은 바다로 향하여 솟아나고 오름은 나란히 서귀포 칠십리를 달린다. 서로 쏠리고 눕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면서 설문대할망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김도경 시인은 <용눈이 오름>의 가을은 둥근 트레머리를 올리고 여린 능선을 따라 단아하게 한 폭의 치마를 휘감아 순정 노을빛 따라 억새 물결은 안단테로 흐른다고 노래했다.

오늘도 우리에겐 치유의 오름이지만 오름의 상처는 계속되고 있다. 붉은색 흙이 훤히 드러나 있었는데 확실히 자연은 빠르게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곳곳에 보인다. 정이월 겨울에 눈이 내리면 능선 가득히 얼음새꽃, 꽃향유가 다시 가득해지겠지. 368개의 제주 생물 오름에 쉼 한 박자 드리우고 싶다.

어느덧 마지막 무대, 관객과 함께 김순이 시인의 <억새의 노래> 시 한 구절씩을 돌아가며 읊는다. 

너는 기도할 때 눈을 감지만 
나는 기도할 때 몸을 흔든다 
빛이 그림자를 안고 있듯이
밤이 새벽을 열어주듯이
그렇게 나도 눈부신 것 하나쯤 지니고 싶어 
(중략)

바람난장 팀원들이 용눈이 오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람난장 팀원들이 용눈이 오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지막한 언덕들이 온통 하얗게 덮여 은빛 안단테로 흐른다. 

내려오면서 아쉬움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했다. 억새는 흔들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글=강미숙(수필가·도평초 교장)                           

▲사회=이정아 ▲시낭송=김정희, 장순자, 이정아 ▲노래=이마리아, 김익수 ▲팬플루트=서란영 ▲색소폰=성동경 ▲참여작가=조선희, 이창선, 강미숙 ▲사진=홍예 ▲그림=홍진숙 ▲음향=장병일

※ 다음 바람난장은 11월 11일 토요일 오전 11시 김녕 ‘청굴물’에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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